진산 무협단편집, 진산, 파란, 2007
그 말투는 검을 거두라는 간곡한 부탁. 순간 눈물이 번져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운청은 검을 내렸다. 그에 따라 노파의 장력도 걷어져 갔다. 운청은 재빨리 긴 소매를 얼굴 앞에서 한 번 펄럭여 고인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을 감추었다.
쌍둥이 남매를 낳은 뒤 황선이 손수 만들어 준 애검의 칼집에 새겨진 ‘불변연정不變戀情’
네 글자를 떠올리며 운청의 눈앞에 눈물이 핑 돌았다.
네 글자 써 있던 칼집 한 귀퉁이가 쪼개져
남은 것은 세 글자,
변연정變戀情.
칼을 들지 않은 무사는 배로 늙어 보인다.
마지막에 태연히 검을 거두는 사람이 승리하는 법이다.
나는 저러다가 그가 별안간 화를 내면 어찌해야 할까 생각했다. 내가 본 바로는 그는 느닷없이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죽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그 옷을 건드리면 한 번에 죽여 버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그 옷을 건드린 정도가 아니라 그 옷 뒤에 숨은 상처를 건드린 것이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화를 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슬며시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려 두었다. 한참 만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무 많이 알면 좋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니?”
나는 긴장이 풀려 손을 스르르 내렸다.
“왜 많이 알면 죽는다고 이야기하지요?”
“진실은…….”
그가 말했다.
“…… 사람의 심장을 터지게 하기 때문이다.”
- 참 이상하지 않아요?
- 뭐가?
- 왜 그렇게 많은 연인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우고 헤어지는 걸까요?
- 그런 건 헤어진 사람들한테나 물어봐.
칼밥을 너무 오래 먹고 산 탓인지 피 튀기는 격전에 뛰어들기 직전일수록 우리는 게으른 기녀들보다 더욱 빈둥거렸다.
웃음에는 쓴 웃음이 있지만 눈물에는 쓴 눈물이 따로 없다. 눈물은 모두 쓰다.
모든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의심할 것도 별로 없는 법이다.
심지어 그믐날의 산속에서도, 가만히 오래 있다 보면 사물의 윤곽을 볼 수가 있다. 만물은 햇빛과 달빛을 받을 수 있을 때 그것을 몸 안에 조금 가둬 두었다가 빛이 없는 순간에도 약간씩 바깥으로 뿜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던 녀석이 있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었어. 그러니까 절망하고 분노해야 하는데,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어. 그래서 절망했지.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걸 깨달아서. 난 그녀처럼 모든 걸 버려도 좋을 사랑 같은 것은 못 한다는 걸 깨달아서 절망했지. 생과 사, 사랑과 미움이 모두 허무한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절망했지. 그때 처음으로 허무를 배운 거야. 술을 마신 건, 실연의 상처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이었어.”
칼집이 없는 칼은, 나신의 여자처럼 위험했다.
물론 무공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온몸이 묘하게 가벼웠고, 정신도 잘 빨아서 다림질해 놓은 흰옷인 양 맑았다.
부러진 다리뼈는, 금이 간 얼음 위에 물을 뿌리고 찬바람을 쐬게 한 것처럼 천천히 다시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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