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더 언더그라운드, 서진, 한겨레출판, 2007
13그램의 눈꺼풀이 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다.
버스는 떠났다. 기차도 택시도 오토바이도 모두 떠났다. 인생에 시간표 따위는 없다. 인생은 오르막길이다. 멈추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끄러지며 내려간다.
방세가 밀려 있더라도, 지독한 감기에 걸려 있더라도, 오디션에 합격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더라도 하루는 24시간이고 한 달은 30일이고 방 값은 매달 나온다.
당신은 지하철에서 얼마 동안 오래 있어봤는지 모르겠다.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승강장에서 전차를 기다리고 갈아타고를 반복하더라도 세 시간은 넘지 않을 것이다. 삼겹살 냄새, 소주 냄새, 싸구려 화장품 냄새, 땀 냄새가 뒤범벅인 밀폐된 공간에서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은 당신이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치 장애인을 배려하기 위해 장애인을 쳐다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영어로 영어를 못한다고 말하면 정말 영어를 못하는 거야?
‘When you see something, Say something(당신이 뭔가를 봤을 때엔, 뭔가를 이야기해라).’
전철 맞은편의 공익광고가 보인다. 지하철 안에 폭탄 같은 수상한 물건을 보면 신고하라는 광고다.
내 인생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버렸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온갖 것을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세상의 모든 일들은 새롭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른들에게도 세상의 몇몇 일들은 새로울 테지만 그들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미라는 분명 내가 물어보기 전에 모든 계획을 짜놓았을 것이다. 앞으로 5년 동안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문득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나의 20년 뒤의 미래까지 계획하고 있을런지도 모르니까. 그녀의 그런 치밀함이 갑자기 진절머리가 났다. 그냥 우리나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한숨을 쉬며 내가 한 말은, “알았어. 그렇게 하자”였다.
사람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일, 그러나 절대로 자신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제대로만 할 수 있다면 뉴욕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질문은 다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아내를 사랑하느냐는 질문. 두 번째는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다시 아내와 결혼하겠냐는 질문. 순진한 당신은 두 가지 질문에 머뭇거리다가 ‘네’라고 답한다. 그 1초도 안 되는 머뭇거림 속에 모든 진실이 담겨져 있다. 아들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당신은 0.1초도 걸리지 않고 ‘네’라고 대답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정말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이와 공원에 산책을 나가는 일마저 사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것에 절망하게 되면 세상 모든 것에 절망하게 된다.
잠시라고 생각했을 때가 위험하다. 다음으로 미루지 마라. 저금하지 마라. 보험에 들지 마라. 현재를 살아라.
어둠컴컴한 방안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그 천장이 어두운 터널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나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면 좋겠다. 한국말로 된 자장가를.
LA가 펑퍼짐하게 넓게 퍼져 있어서 저절로 잠이 오는 도시라면, 뉴욕은 높은 빌딩에 많은 사람들이 한군데 보여 있어서 잠이 오지 않는 도시다. 잠이 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지하철과 버스, 그리고 노란 택시가 쉬지 않고 달린다.
낮에는 기억나지 않지만 새벽에 깨어나면 악몽이 기억나잖아.
싸이클론이라고 불리는 이 롤로코스터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롤로코스터다. 가장 높아서도 아니고 가장 긴 트랙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니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 당신의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섭다.
꿈을 꾸다 아침에 눈을 뜰 때엔 새로운 집에서 깨어나고 싶은데 그게 안 돼.
당신은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다닌다. 종이에 써져 있는 것이든,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든 상관없다.
아이들은 당신을 피하지만 때론 주머니 속의 만 원짜리를 덥석 쥐어주므로 눈치를 살핀다. 아내는 당신을 침대에 밀어 넣고 한참동안 당신을 쳐다본다. 아내가 원했던 남편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축 늘어져서 삿대질을 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낸다. 술 냄새와 발 냄새가 섞여서 세상 최악의 냄새를 만든다.
당신이 하는 일은 당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다. 당신이 아는 것이란 고작 거대한 톱니바퀴의 찌든 때에 불과하다. 당신은 찌든 때에 관해선 도사다. 언제 어떤 식으로 닦아야 하는지, 잘 먹는 세제가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당신이 지킬 수 있는 모든 것은 찌든 때에 불과하다.
아내가 바랬던 남편은 당신이 아니다. 아이들이 원했던 아빠도 당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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