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동문선(東文選), 2007

 

 

 

 

 

 

-         사실을 말하자면 상상력이 대다수 인간들에게서 어떻게 죽어버리는 지 결코 검토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이 어린아이들에게서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듯이, 철학자는 여전히 철학적 상황에 처해있다.

 

 

 

 우리가 정신분석학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시는 위엄 있는 말실수로 정의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열광하면서도 착각하지 않는다. 시는 말의 운명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들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이미지들 앞에서, 우리 자신은 결코 상상할 수 없었을 그런 이미지들 앞에서 느끼는 그 순진한 경탄은 매우 자연스럽다.

 

 

 

의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행위이며, 인간의 행위이다.

 

 

 

 내가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못하고 있는 한 작가는 펜촉이 뇌의 한 기관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도 그렇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울한 때에 감옥에 있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는가?

 

 

 

 꿈이 주는 낯섦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어떤 다른 주체가 우리 내부로 꿈꾸러 오는 것 같다. 어떤 꿈이 나를 방문했다. 이것이 바로 밤에 꾸는 커다란 꿈들의 수동성을 확인하는 표현이다.

 

 

 

 행복한 어린 시절의 추억은 시인으로서의 어떤 성실성을 통해 언급된다. 끊임없이 상상력은 기억에 생기를 불어넣고 기억을 설명해 준다.

 

 

 

 어린 시절은 일생 동안 지속된다.

 

 

 

 우리 안에서 어린아이는 때때로 우리의 잠 속에 철야하러 온다.

 

 

 

 과거의 우리였던 어린아이와 함께 살 필요가 있고, 때로 그렇게 사는 것은 좋다.

 

 

 

 밤에 꿈꾸는 자는 코기토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받은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환대해야 한다. 동화시켜야 한다고 교육학자와 영양학자는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 책을 빨리 읽지 말고 너무 큰 조각을 삼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고받는다.

 

 

 

 그런 만큼 아침부터 내 책상에 쌓인 책들 앞에서 독서의 신에게 나는 탐식적인 독서가의 기도를 이렇게 올린다.

오늘도 우리에게 일상의 배고픔을 주소서…….

 

 

 

 회화에서 푸른색이 붉은 색을 노래하게 만들듯이, 시에서 여성형 낱말은 남성적 존재에게 우아함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하나의 낱말은 새벽일 수 있으며 심지어 확실한 피난처일 수도 있다.

 

 

 

 발레리라면 우리는 우리가 말을 거쳐 가는 속도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낱말들은 글자들이 사지 역할을 하는 신체들이다. 섹스는 언제나 모음이다.

 

 

 

 그리하여 지극히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가 죽은 존재를 불러올 때, 우리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를 이상화시킬 때, 독서 속에서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유로울 때, 우리는 삶 전체가 이중화되는 현상- 과거가 이중화되고 모든 존재가 이상화 속에서 이중화된다 을 느끼고, 세계가 우리의 공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통합함을 느낀다.

 

 

 

 이 모든 이상화 덕분에 몽상가 역시, 시인은 상승하면서 자신의 토대를 발견한다고 말하는 파트리스 드 라 투르 뒤 핀의 위대한 명구를 따라 자신을 양분시키면서 살아간다.

 

 

 

괴테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석은 근본적 현상이다(Das Magnet ist ein Urphanomen).

 

 

 

 우리가 우리 안에 여성적 존재를 지니고 있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휴식을 취할 수 있겠는가?

 

 

 

 힘과 아니마의 성실함을 끝까지 이끌고 가는 게 가능한가? 우리는 에커만의 책의 주석자처럼 자신만만하지 못하다. 그는 작가의 심리를 규정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금언으로 삼았다. 네가 창조하는 자를 말해 다오,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

 

 

 

 우리가 시도했던 삶에서, 우리의 초창기 삶에서 우리의 얼굴은 여럿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단일한 통일성을 경험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력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해가 거듭할수록 결국 우리 자신을 닮고 만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라는 통일성을 중심으로 우리의 모든 존재 양태들을 결집시킨다.

 

 

 

 어린아이는 달, 그 커다란 황금빛 새가 숲 속 어딘가에 둥지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장 폴랭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는 조용한 어린 시절과 동요하는 청춘 시절의 경계에 대한 얼마나 대단한 감성이 묻어나는가. 실체가 울고 있던 그런 아침들이 있었다……. 이미 유아 시절이 그 안에 품고 있는 그 영원의 감정은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단 한번만 죽는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여러 번에 걸쳐 태어났다.

 

 

 

 니체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우리 영혼의 구조와 일치하는 건축물을 개략적으로 구축하고자 한다면 () 그 구조를 미로에 따라 구상해야 할 것이다.

 

 

 

 인간 영혼과 세계의 관계는 그림 같은 것을 넘어서 강력하다. 그때 우리의 내부에서는 이야기의 기억이 아니라 우주의 기억이 살고 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들이 되돌아온다.

 

 

 

 시인은 전기작가보다 더 우리에게 우주에 대한 그 추억의 본질을 제공한다. 보들레르는 단번에 이 민감한 점을 건드린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기억은 매우 생생한 상상력, 다시 말해 감동을 주기 쉽고, 따라서 과거의 장면들을 삶의 매혹처럼 제시함으로써 그것들을 매 감각에 의지해 환기시킬 수 있는 상상력 속에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어린아이가 인간의 스승이 된다면, 인간은 얼마나 형이상학적으로 위대할 것인지 이해했다. 들판의 백합과 하늘의 새라는 제목이 붙은 명상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누가 나에게 어린아이의 선한 마음을 가르칠 것인가!

 

 

 

 프란스 엘렝스는 다음과 같은 직관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인간의 어린 시절은 그의 삶 전체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성숙한 나이의 소관이다. 나는 이 수수께끼를 지니고 30년을 걸었지만 그것에 어떤 사랑을 주지 못했다. 이제 나는 내가 길을 나섰을 때 모든 게 이미 언급되었다는 것을 안다.

 역경·슬픔·실망은 어쨌거나 나에게 타격을 주거나 지치게 하지 않고 내 위를 지나갔다.

 

 

 

 버터가 듬뿍 발라진 태양이 푸른 하늘에서 구워지고 있었다.

 

 

 

 행복한 날들에 세계는 먹을 수 있는 것이 된다. 향연을 준비했던 대단한 냄새들이 기억 속에 떠오를 때, 보들레르를 좋아했던 나는 추억들을 먹는 것 같다.

 

 

 

 그는 밤에 꿈을 꾼다. 따라서 그는 밤에 존재한다. 그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꿈을 꾼다. 따라서 그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피에르 알베르 비로는 아담의 행복을 그렇게 체험하라고 제안한다. 나는 세계가 내가 먹는 과일처럼 내 안으로 들어옴을 느낀다. 정말 그렇다. 나는 세계를 먹고 산다.

 

 

 

 내가 사물을 몽상했을 때에만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내 정신의 특이한 성향이다.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어떤 확신을 지닌다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 안에 그것을 고정시켜 그로 인해 존재가 변화된다는 것이다.

 

 

 

 아마 정신과 의사는 친근한 대상들이 유령화되는 현상을 많은 환자들에게서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객관적인 관계로 인해 작가와는 달리, 유령이 우리의 유령이 되도록 도와주지 못한다.

 

 

 

 진실한 사랑을 하는 위대한 날들, 노발리스적인 포옹(Umarmung)의 시간들을 제외하면, 인간은 인간에게 표면이다.

 

 

 

 나는 회색빛 조약돌이다. 나는 다른 명칭이 없다.

 나는 내가 선택한 꿈을 단단히 하면서 몽상한다.

 

 

 

 몽상의 인간은 자기 공간의 전 부피 속에 진정으로 거주함으로써 어디에서나 자기 세계 속에 있으며, 바깥이 없는 안에 있다. 몽상가는 자신의 몽상 속에 잠겨 있다라고 흔히 말해지는 것은 맥없이 그러는 게 아니다. 세계는 그와 더 이상 마주하고 있지 않다. 자아는 세계와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몽상 속에는 더 이상 비자아가 없다. 몽상 속에서 부정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

 

 

 

 우리 안에 있는 그 꿈은 우리의 것인가

나는 홀로이면서 증식되어 가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인가, 나는 타자인가

우리는 상상된 것에 불과한다.

 

 

 

 노빌리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교양의 최고 과제는 초월적인 자기를 소유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 자기 나의 나가 되는 것이다.

 

 

 

 영혼이 있는 인간은 우주에만 복종한다.

       가브리엘 제르맹,

 

 

 

 몽상을 하는 자가 일상의 가득 채우는 모든 관심사들을 물리쳤을 때, 그가 타자의 근심으로부터 오는 근심에서 벗어났을 때, 그리하여 그가 진정으로 자기 고독의 장본인이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그가 시간을 따지지 않고 우주의 아름다운 측면을 관조할 수 있을 때, 이 몽상가는 자신 안에서 열리는 어떤 존재를 느낀다.

 

 

 

 수평선이 가장자리를 이루는 내 잔에다

 나는 한 잔 가득히

 창백하고 얼음장 같은

 태양빛을 단숨에 꿀꺽 마신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묶어둔다.

 

 

 

 우리는 앞장에서 과일은 그것만으로도 세계의 약속이고, 세계에 존재하도록 권유하는 초대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정신과 의사안 J. H. 슐츠의 자생적 트레이닝이라는 방법에서 빌린다. 호흡의 리듬은 나는 완전히 호흡 그 자체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내적 명백성을 획득할 수 있다.

 

 

 

 ! 온 가슴으로 호흡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나는 자유롭게, 충만하게, 드넓게 숨쉰다. 아라비스탄의 모든 공기도 나의 폐에는 부족하다.

 

 

 

 화가는 가수가 긴 연습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될 줄 알듯이, 자기의 시선을 갖게 될 줄 안다.

 

 

 

 젊은 시절의 한 에세이에서 니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명은 다양한 색채로 장식된 하늘에서 놀고 있다. 나의 두 눈은 전혀 다른 섬광을 지니고 있다. 나는 두 눈이 하늘에 구멍을 내지 않을까 염려된다.

 클로델의 작품에서 눈의 우주성은 보다 관조적이고 덜 공격적이다.

 

 

 

 호수의 시선과 인간 눈동자의 시선 사이에는 놀라운 닮음이 있다.

 

 

 

 산에 목구멍(gorges)이 있는 것은 바람이 옛날에 그곳에서 말했기 때문이 아닌가?

 

 

 

 숲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반사하는 물을 사랑하지 않는가? 하늘의 아름다움과 물의 아름다움 사이에는 상호 찬탄이 있지 않은가? 반사된 모습에서 세계는 두 배나 아름답다.

 

 

 

 그를 찾아가서 만지면서도 느낄 수 없는 곤돌메기는 그를 쫓아다니다가 자신이 그를 많이 관통해 지나갔음에 놀란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무(rien)이고 밤(la nuit)이 죽게 만드는 어떤 밤이다.

 

 

 

 당신의 몽환적인 비상에서 당신이 갑자기 깨어난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이 발견하는 것은 이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발이 디딜 곳을 잃어버렸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사실 당신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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