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예찬, 지오 폰티, 열화당미술책방, 2004(초판 2쇄)
이것은 건축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건축을 위한 책이다
건축은 문명생활의 다섯 가지 조건 중 하나이다 – 빵, 의복, 일거리, ‘집’, 동화 – 동화? 그렇다. 동화도 이에 속한다.
건축은 인간사회에 있어서 질서이다. [그러나 허버트 리드(Herbert Read, 영국의 시인, 예술비평가 – 역주)는 비록 질서일지라도 상상력에 호소해야 한다고 말한다.]
건축: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예술. 건축에 있어서는 신동(enfants prodiges)이란 없다.
건축은 쉽다. 아주 쉽다. 훌륭한 건축은 자연발생적인, 전적으로 자연발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발생적’인 건축으로서 전원주택들, 옛 마을들 – 포시타노(Positano), 이비자(Ibiza), 알베르벨로(Alberobello), 산토리노(Santorion)의 건축물들 – 과 건축가 없는 건축물들을 지적할 수 있다. 사용자의 기본적 요구에 부합하는 사무실 건물도 역시 ‘자연발생적’인 건축이다. 그러므로 건축은 쉽다. 우리 건축가들이 형편없는 건축가이거나 탁상 공론가(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일 때, 그리고 건축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건축은 어려워지는 것이다.
오늘의 건축은 종래의 관례를 거부한다. “언제나 이렇게 했었다”는 따위의 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도시는 교통계획에 따라 계획된다.
꿈과 같이, 건축은 움직이지 않는다. 꿈은 제자리에 머물다가 사라질 뿐이다. 건축은 정지해 있다.
예술은 움직임으로써가 아니라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다. 미론(Myron)의 <원반 던지는 사람>은 비록 수천 년 동안 정지해 있지만 이것은 영원한 동작을 내포하고 있다.
건축은 형태이고, 그러므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어떤 비율로 고정된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단순한 요소들만 반복해 만든 구조물을 예술로서 건축작품이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형태가 아니며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 자체 한계가 없는 형태란 있을 수 없다.) 그런 구조물은 단순히 건물일 뿐이다. – 리듬은 있을지언정 음악은 없다.
공학과 건축 사이에 정확하게 경계선을 긋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정확하지 않은 게 대부분이라는 것이 정확하다는 말의 특성이니까.)
정확치 않거나 무심한 사람을 몽상가라고 일컫는 것은 잘못이다. 진정한 몽상가란 정확하게 꿈을 꾸는 사람이다.
색은 건축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재료에만 속한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절규한다. 높게, 민감하게, 길게 그리고 짧게 절규한다. 그리고는 죽는다. 그 절규가 진실한 것일 때, 오로지 진실한 것일 때 역사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예술에 있어서 가치를 예상하거나 전제하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범주나 (건축에서는) 계획으로 예술을 전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술은 하나의 예외이다. 그것은 고립(isolation)이라는 하나의 사실(fact)이다.
‘예술건축’이란 말은 좀 우습다. 마치 ‘예술문학’이나 ‘예술시’ ‘예술회화’ ‘예술음악’이란 말이 우스운 것처럼. 예술은 하나의 결과이지 전제는 아니다.
요사이 우리는 자기도취적인 나르시시즘으로 자기선전을 하는 버릇이 있다. 우리는 슬로건을 내걸고 행동한다. 그러나 그대는 상상해 볼 수 있는가? 보로미니나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또는 과리니(Guarino Guarini)가 “지금 우리는 바로크 시대를 창조하려고 한다”라고 선언하는 것을. 또는 루이 십오세가 “자, 이제부터 루이 십오세 양식을 발명하자”라고 하는 것을.
전통에 대한 진실한 보답은 대담하게 현대성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몽상가가 아니다. 그들은 진정한 현실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현실을 꿈으로 바꾸지 않고, 꿈을 현실로 바꾼다.
소위 세련된 사람이란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는다 항상 모든 것에서 세련되고 아름다운 재료만을 찾는 것은 세련과는 거리가 멀다.
(기계의 기능은 그 자체의 움직임에 의미가 있다. 집과 방과 건물의 기능은 우리의 움직임을 이끌어 가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방바닥은 하나의 법칙이다.
오벨리스크는 수수께끼이다.
분수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계단은 소용돌이이다.
지붕은 뱃머리를 세우고, 하늘을 항해한다.
궁륭형 천장은 비상한다.
발코니는 한 척의 범선이다.
창은 한 점의 투명한 그림이다. (그것은 견해이며 인생이다.)
방은 하나의 세계다.
마천루는 힘이다.
문은 한 장의 초대장이다.
열주(colonnade)는 합창이다.
집은 하나의 꿈이다.
건축가는 계단이라는 배우의 ‘연기’를 들어야 한다.
무덤의 정면에는 창이 없다. 거기서 나올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창은 삶을 의미한다 – 그것은 내용이다. 무덤에는 내용이 없다.
장식한 천장은 사람의 기호에 따라 읽을 수 있고, 또 읽힐 수 있는 하나의 페이지이다.
루이자, 이 이탈리아 여인은, 여성에게 문이란 한 장이 초대장이라고 덧붙인다.
남의 집에 마음대로 들어간다는 것은 꿈을 짓밟는 것이며, 그리고 절망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여성들의 관념은 달팽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자신의 집을 걸머지고 다닌다.
집이 꿈이라는 것, 그것은 하나의 콤플렉스이다.
새들은 그들의 둥지를 갖고 있다…오로지 인간들만 그들의 집이 없다.
시멘트, 목재, 돌, 철재, 강철, 알루미늄, 세라믹, 유리, 그 어느 것도 영속성 있는 건축재료는 아니다. 건물에서 가장 영속성 있는 재료는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변함이 없는 유일한 건축재료이다.
원자탄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예술이다.
자연의 완벽함 속에는 하나의 신이 존재한다. 인간 내부에는 두 개의 신이, 즉 신과 유사한 신, 그리고 인간과 유사한 신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연에 도학(기하학)이라는 마력을 도입했다. 그러나 자연은 그것을 싫어한다. 정원사가 쉴 새 없이 가위질을 해야만 바라는 대로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음을 보라.
엘지(Elzy)라는 헝가리 여인은, “그렇지만 우리가 집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 소리가 바로 들려 오는 것이 좋지 않아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때 비로소 나는 동선의 문제와 음향학(방음으로서), 그리고 이디엄이라는 것에 집착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달았다.
“감각은 이성이 느끼지 못한 이성을 느낀다.”
(이브는 아담에게 순수하고 단순하게 사고를 먹도록 미소로써 영원히 권하고 있다. 반면에 아담은 그 때마다 바보처럼 사과를 어떻게 먹을 것인가라는 논술을 편다. 여기에서부터 파멸은 시작한다.)
도로와 하수구를 건물 사이에 갖기 위해서 건물들은 서로 밀착해 있기 보다, 이제는 자유롭게 혼자 서 있어야 한다. 밀착한 건물들은 건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을 천장으로 한, 크고 볼품없고 불규칙한 복도의 이질적인 양쪽 벽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을 한 개인이 되게 하자.
[그대는 마티스가 붉은색을 사용하기에 앞서 대중에게 그 색을 좋아하느냐고 물어 보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고건축은 자연과 잘 어울린다. 자연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자연의 나이는 상당하다. 다만 봄이 되면 몹시 젊어 보이긴 하지만.)
“현실을 혐오하기 쉬우므로 이상주의자는 위험하다”라고 아나톨 프랑스는 말했다.
아나톨 프랑스는 말한다. “사실 우연이란 하느님이다.”
낮에 보이는 건물과 밤에 보이는 건물을 나는 함께 디자인한다.
가상의 일기
건축을 사랑하는 정치가가 존재한다.
(더욱 가상적으로)
심지어는 현대건축까지도 사랑하는 정치가가 존재한다.
(더더욱 가상적으로)
또한, 현대건축을 이해하기까지 하는 정치가도 존재한다.
고대의 피라미드는 하나의 신앙이었고 인간의 삶이 그것에 희생됐습니다.
어리석게도 나는 신부님에게 “당신은 행복합니까?”라고 물었다. 신부님은 응답했다. “우리는 평안합니다”라고.
나는 이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캄필리에게 그가 성공할 것으로 믿는 마음에서 “나는 B부인(중요한 인물)에게 그녀의 초상화를 당신께 부탁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캄필리는 “내가 유력한 B부인의 초상화를 제작한다고 해서 나의 그림이 과연 얼마나 나아질까요?”라고 대답했다.
(중요한 것은 오직 건축뿐이다. 중요한 고객이란 단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사람이거나, 또는 건축에 대해 훌륭한 생각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 또는 올리베티가 요구하듯 진정한 건축을 요구해 오는 사람들이다.)
“모든 재료에는 형태를 향한 향수가 있다.” – 뵐플린(Heinrich Wolfflin)
모든 사물은 궁극적인 형태로 향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에 곤돌라는 곤돌라로서 남는다. 자전거는 그것의 진정한 형태에 도달했다. 자동차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과거의 작품이라고 해서 과거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과거라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현재에 존재한다.
‘현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란 바로 미래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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