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월요일 저녁
거실에 스텐드를 켜 놓고
네모난 밥상에 앉아 글을 쓰는데
베란다엔 커다란 거미
엄지손가락 만한 왕거미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가 딱 멎어
연필꽂이로 쓰는 노란 컵을 뒤집어
펜들을 쏟고 급히
거미를 뒤집어 씌워
덮어
잡았다
그 밑으로 책받침을 끼워 넣어
컵을 바쳐 든 뒤
베란다 창문을 열고
화단으로 던져 주었더니
비호(飛虎)같이 기어 사라진다
죽이기는 싫었다
또 들어오면
잡아서 기를 것이다
10초도 안 되어 종료된 상황이다
10초의 섬광(閃光)
그런데
거미 한 마리가
불을 끄고 나갔다.
얼마 전 옛 친구와 술을 마셨는데, 예전의 연인은 의심이 많고 집착이 많아서 싫었는데, 지금의 연인은 의심도 없고 걱정도 없어서 사랑도 없어 보인다고 내게 고민 상담을 했다.
다이어트 중이라고 안주도 없이 술만 마시는 옛 친구에게 난 이렇게 말했다. “YO~ WOMAN! 그렇다면 너는 상대방이 진짜로 사랑하면 사랑하고, 상대방이 가짜로 사랑하면 안 사랑할 거냐?”
내가 술자리에서 뱅글뱅글 맴도는 대화들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친구의 고민처럼 값싼 고민들이 무한REFILL 되기 때문에 금방 물려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고민들을 듣다 보면 결국, ‘난 속기 싫다’, ‘난 손해보기 싫다’, ‘난 상처받기 싫다’의 속셈이 LOVE의 탈을 쓰고 춤을 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 고백을 한다면 4월 1일에 하면 어떨까 하고. 상대방이 OK하면 진심이었다고 하고, 상대방이 NO하면 만우절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좋겠다고. 당시엔 기가 막힌 IDEA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승낙을 얻으면 진심이 되고, 거절 당하면 거짓이 되는 PROPOSE라니. OOPS!
이 시를 보며 나는 거미 보기에 부끄러웠다. 우리는 왜 가치 있는 고민을 하기 보다, 가치가 낮은 고민에 더 마음을 쓰고 공감을 하는 걸까. 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지금의 연인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 대신에, “어떻게 하면 지금의 연인을 내 맘에 꼭 들게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는 걸까?
내가 가끔씩 하는 이런 고민을 시속 화자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거실에 스텐드를 켜 놓고/네모난 밥상에 앉아/글을 쓰’며 보다 가치 있는 고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OH MY GOD! 도저히 방법이 없어! 우린 한낱 이기적인 HUMEN이야!” 라며 한눈을 팔 때 거미를 보았을 것이다. 좋은 생각은 못 잡더라도 이 ‘커다란 거미’라도 잡아서 위안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눈을 팔고 딴짓을 하는 동안 마음 속에 불이 꺼져버린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거미는 다시는 남자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고, 이 남자는 불 꺼진 방을 나가 옛 친구를 찾아가서 지금의 연인에 대한 불만과 고민을 CONSULT받을 것이다. ‘월요일 저녁’을 지나 화요일 새벽이 되면 만우절이 되어있을 것이다.
다들 HAPPY 만우절 보내시고, 만우절에 사랑 고백은 피하시고, 가끔은 상대방을 위한 고민을 해보기 바란다. 인수위의 영어정책에 VERY 경의를 표하며 ENGLISH를 섞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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