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사라져가는 오늘의 주름 아래서

 

 

 

지구의 등에 털이 돋듯 가로등 하나 켜지면

TV 속 욘사마 보며 눈물 흘리는 일본 아주머니나

개 한 마리에 기대어 공원길 나서는 파리의 게이 아저씨나

또 주머니도 없는 빨간 바지를 꺼내 입고

거울 없는 방을 벗어나 슈퍼마켓 유리창에 모습을 비쳐보는 나나

깜박이는 피부 세포 아래 오물오물 미소 지으며

슬슬 사라져가는 오늘의 주름을 바라볼 것이다

후회하기도 전에 불이 꺼지는 오늘

그래서 늘 불 꺼진 뒤에 후회하게 되는 날들 속에서

기억이란 자꾸 살갗을 베는 뻣뻣한 종이였다가

너덜너덜 구멍에 바람 들어가 한눈 팔면 날아가버리는 종이로 옮아간다

고기를 쑤셔 소시지를 만들듯이

기억 속에 훈제되어 오래 저장될 오늘

술 안주로 종종 꺼내올 심심찮은 오늘

모레였다가 내일이었다가 결국 오늘이 되기로 한 계약서

안다는, 항복한다는 신호처럼, 깃발처럼

지구 등 위로 가로등 하나 켜지고

바람에 털 날리면

독일에 사는 질레트씨가 3중날로 면도를 하건

핀란드 갈매기 식당에서 오늘의 코피루악을 내리건

테이블보를 뒤집어 김치국물 감추고 맘에 안 드는 빨간 반바지를 벗어버리건

상관없이 시간의 이발사가 다가와 가로등을 쓰다듬다 탁

잘라내면, 깜깜해지면

오늘의 주름이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에 뒤덮이고

멀리 아주 멀리 땅 끝에서 물 내다 버리는 소리 들리고

그리고 오늘도 아무도 아무를 믿어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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