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08 가을

 

 

 

 

 

 

 

 해 지는 저녁 능선

 

                   정진규

 

 해 지는 저 저녁 능선으로 뛰어가는 한 사내가 보인다 해 지면 능선에 서 있는 나무들의 키가 분명해지는데 웬 사내가 오늘은 능선에서 뚜렷해지고 있다 나무들은 그냥 서 있어서 더욱 그렇다 사내는 움직이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또 하나 있다 능선으로 기일게 치닿는 고라니, 분명 고라니일 것이다 며칠 전 덫에 걸린 고라니 장고기로 밥을 먹었었다 고라니를 쫓고 있는 사내, 점점 거리가 벌어진다 그 간격만 결국 보인다 어둠이 왔다 사내도 고라니도 보이지 않는다 간격의 실물들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간격만 보인다 해 지는 저녁 능선도 그 실물들을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간격이 확실해졌다

 

 

 

 

 

 

 

 

개간지

 

         고재종

 

 어느 여인을 6년간 그리워하다가, 그 여인이 맞선 본 남자의 구애에 채 6시간도 못 되어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그제서야 그는 한 번도 구애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월은 빠르고, 여인들은 더 빨리 늙는다.*

 

 그 비자림의 잎새들은 비비비非非非 손을 저었다

 나는 그 처녀지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 주위만을 서성거렸다

 그 골짜기로 안개는 무장무장 피어올랐다

 왠지 그 하나쯤은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싸워서 지켜내야 할 그 무엇이 없다는 건

 무엇에든 싸워야만 한다는 사실보다 더 나쁜 것이기에

 

 하지만 세월은 빠르고, 처녀들은 개간지처럼 환히 뚫린다

 

 

 

* 김영민, 『동무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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