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뭐가 되고 싶은 걸까.

아니 그보다 뭘 하고 싶은 걸까.

세상을 움켜쥐고 싶은 걸까?

커다란 발톱을 지니고 세상 한 귀퉁이를 콱! 움켜지고서

멀리서 보면 그저 매달려있을 뿐인 그런 동작을

스스로는 내가 모든 걸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하며

하고 싶은 걸까?

혹은 헤쳐나가고 싶은 걸까?

강물을 치솟아 오르는 연어처럼

날 가로막는, 뚫기란 불가능해 보이는 압력을

헤쳐 오르며 강물의 시작점 개울과 골짜기 냇물까지 거슬러 올라

맨 처음 한 모금 앞에 가 쓰러지고 싶은 걸까?

이건 좋다.

내가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그 형태라든지, 의미라든지, 상징성이라든지,

그게 뭐든 좋다.

나는 늘 이런 걸 생각하며 자라왔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자라기를 멈추고

그저 늙기 시작한다고 느낀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거의 같은 시기부터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내 이상을 멈추는 순간부터

그저 늙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는 실제로 그랬다.

뭐가 되고 싶다거나 어떤 의미를 쫓는다거나

하는 동안은 사실 지금보다 몇 배나 혼란스러웠다

세상은 언제나 내 이상과는 터무니 없이 동떨어진 모습이어서

2D 애니메이션 세상에 홀로 3D애니메이션으로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방패연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타고 날아오른다거나

혹은 날아오르지 않더라도 자유를 찾아 떠난다거나

하는 생각을 멈춘 동안은 마음이 편했다.

사실 그건

마음이 수축되고 둔감해져 편안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표면이 줄어들고 건조해지고 무감각해져서 그런 지도 모른다.

그저 줄 맞춰서 하라는 일 잘 하고

그 중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소위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동안은

세상도 내 삶도 비교적 명확했다.

퇴근길 택시 안에서 허무함 속에 잠기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그 허무감은 내가 정체를 짐작할 수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 같은

그저 불 끄면 거기 있는 어둠 같은 것이었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예전에 나를 잠식하던 허무는 온갖 것들로

혹은 온갖 것들이 될 수 있는 잠재요인들로 가득했다.

나는 허무를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지금은 장님처럼 그게 그냥 그렇게만 보인다.

(잘못된 표현이다. 장님에게 어둠이 어떻게 보이는지 난 모른다.)

들여다본다거나 하는 착각, 또는 행위를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살다 보면 난 뭐가 되어 있을까?

기묘하게도 뭐가 되고 싶은지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그가 미래에 뭐가 되어있을지를 짐작하기가 너무나 쉽다.

바로 그의 주변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물방을 서너 개를 가까운 간격으로 떨어뜨려 놓을 경우

스스로를 끌어당겨 하나로 뭉치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저 사람들 중 하나가 될 뿐이다.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야생으로 가야 한다거나

미지의 우주로 향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되 그들 중 하나라고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내게 삶의 체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섞이자, 고 둘러싼 사람들에게 섞여선 안 된다.

섞인다는 건 생각이나 삶의 어느 부분을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점차 나만의 것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하나로 뭉친 물방울 중 어느 게 내 원래 물방울이었단 말인가.

설사 원래 내 물방울은 물방울이 아니라 잉크방울이었다고 하더라도

섞인 뒤에는 분리와 구분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섞인다는 건 원래의 그것이 이미 사라진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많은 일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비슷한 라인에 서있는 동료들. 선후배들.

나보다 윗선의 간부들.

그들의 기준에서 그들과 협력하며 경쟁하며

내가 더 우세하다는 것, 더 총명하다는 것, 더 가슴이 두텁다는 것,

운이 내게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밤을 새고

약속을 미루고, 사랑하기를 멈추고,

몸의 방향을 회사쪽으로 틀어놓은 채로 살아가는 동안

내가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심한 피로를 부른다.

숨 쉬지 않고 헤엄치는 것처럼.

물론 숨 쉬지 않고 헤엄치는 것과는 달리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일에 몰두한다고 해서 생명이 멈추진 않는다.

대신 영혼이 멈추겠지.

문제는 영혼이(그게 있든 없든지 간에 뭐라 부르건 간에) 의식과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지 그게 죽어도 알아차리지 조차 못한다는 것이다.

그저 뭔가 변했다고 느낄 뿐.

그리고 사실 그건 당연하다.

영혼이 죽는다는 건 감각의 대부분이 죽어버린다는 거니까.

통증을 못 느끼는 수술을 받은 검투사처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더 강한 힘을 얻게 되는 지도 모른다.

물론 타인을 억누르거나 공포감을 심어주는데도 유리하고,

거짓말을 하거나, 타협하거나, 은근히 사실을 감추거나, 내 유리한 방향으로 합리화하기도 쉽고.

어쩌면 비온 뒤에 보도블록 위로 기어나온 지렁이처럼

뒤틀뒤틀하고 싶은 지도 모른다.

비를 쫓아 밖으로 나왔지만 어느새 비는 마르고

돌바닥은 쓰라려 쓰라려

돌아가려니 집은 못 찾겠고, 흙들은 더 떤딴해졌고

비에 취해 뒤틀뒤틀.

그런 것도 좋다. 그런 것도.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뭐가 되고 싶은지, 이 세상에 혹은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되고 싶은지 떠올려야 한다.

그게 날 떠오르게 할 것이다.

난 광대처럼 도도하고

내 도도함을 사람들이 모르게 할 것이다.

웃음소리를 들어도 좋을 것이다.

하나로 뭉쳐버린 물방울들은 결국

아직 뭉치지 않은 바깥을 향해 웃음(비웃음이라도)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런 웃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가 아직

저들 바깥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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