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보는 시인

 

 

 

애인과 영영 헤어진 날

남자는 술을 마시거나

자위를 한다

혹은 둘 다 하거나

내 얘기는 아니다

난 시인이니까

달력에 먹으로 그려진 학처럼 서서

떨어진 깃털의 궤적을 쪼아

사라진 먹 향을 맡으며 노래를 부를 뿐이다

넘어간 달력이 몇 십장 되돌아오며

때 묻은 추억 위로

떨어져 뿌리를 적시는 먹물 잎사귀 몇 장

그 속에 우두커니,

처음 종이가 되어보는 펄프처럼 서서 발톱을 추스를 뿐이다

슬픔에 곤두선 깃털이

먹으로 그려진 달팽이의 촉수처럼

번져간다 아니! 그러고 보니

학이나 달팽이나

다 먹으로 그린 그림

먹다 남은 와인을 다시 꺼내 마시며

자위를 할까 그냥 잘까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땐 시인이 아니다

난 시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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