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권,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09(1판1쇄)
고마쓰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열리는 일 없는 서랍의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낸 듯한 웃음이었다.
덴고가 보기에 그는 오히려 고립을 좋아하고, 타인의 경원하는 눈초리를 – 혹은 분명하게 미움받는 것을 – 꽤 즐기기도 했다. 예리한 정신은 안락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다, 라는 게 그의 신조였다.
일자리쯤이야 금세 또 구할 수 있어. 내가 말이지, 무슨 돈을 바라고 이런 일을 하려는 게 아니야. 내가 바라는 건 문단을 조롱해주자는 거야. 어둠침침한 동굴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서로 칭찬하고 상처를 핥아주고 서로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한편으로는 문학의 사명이 어쩌고저쩌고 잘난 소리를 주절거리는 한심한 자들을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어.
잠도 깊이 자는 편이다. 하지만 무슨 일로 일단 잠이 깨면 그다음은 제대로 잠들지 못한다. 그런 점은 신경이 예민하다. 그건 고마쓰에게 수도 없이 말했었다. 한밤중에 제발 부탁이니 전화하지 말아달라고 분명하게 당부했다. 수확 전의 논밭에 메뚜기 떼는 제발 보내지 말아달라고 신께 기도하는 농부처럼. “알았어. 이제 밤중에는 전화 안 할게.”라고 고마쓰는 말한다. 하지만 그런 약속은 그의 의식에 충분히 뿌리를 내리지 않기 때문에 한 차례 비가 내리면 깨끗이 어딘가로 휩쓸려가버린다.
“적분 이야기는 재미있었어요.”
“학원에서의 내 수업 얘기?”
후카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수학을 좋아해?”
후카에리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수학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분 이야기는 재미있었구나?” 덴고는 물었다.
후카에리는 다시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소중한 것을 말하듯이 적분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나?” 덴고는 말했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다.
“소중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았어요.” 소녀는 말했다.
앞으로의 일은 나도 몰라. 물론 리스크는 있어. 하지만 리스크는 인생의 스파이스야.
“몸 상태가 내 맘 같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못 가겠어. 다음 주에 봐.”
몸 상태가 내 맘 같지 않다는 건 생리기간이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연필로 종이에 쓰는 경우와 워드프로세서의 키보드로 치는 경우는 채택하는 언어의 감촉이 다르다. 양쪽의 각도에서 점검해보는 게 필요하다.
세상 사람들이 영국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운명에 대해 어째서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지, 아오마메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찰스는 겉모습만 보자면 왕세자라기보다는 위장에 문제가 있는 물리교사처럼 보였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두 개의 측면이 있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덴고는 말했다. “좋은 면과 그다지 나쁘지 않은 면, 두 가지입니다.”
육체야말로 인간의 신전이다.
고환을 걷어찰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망설임을 배제하는 것이다. 상대의 가장 허술한 부분을 무자비하게, 전격적으로, 치열하게 공격한다. 히틀러가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중립국 선언을 무시하고 유린해버리는 것으로 마지노선의 약점을 찔러 간단히 프랑스를 함락시킨 것과 같다.
“그건 이제 곧 세계가 끝나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아픔이야. 그거 말고는 제대로 비유할 말도 없어. 보통 아픔과는 전혀 달라.” 아오마메가 설명을 청했을 때, 어떤 남자는 심사숙고 끝에 그렇게 대답했다.
아오마메는 그 비유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세계가 끝나?
“그럼 거꾸로 말하면, 세계의 종말이라는 건 고환을 세게 차였을 때 같은 건가?” 아오마메는 물었다.
“세계의 종말을 아직 체험해보지 않아서 정확한 말은 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남자는 말을 멈추고 막연한 눈빛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그저 깊은 무력감밖에 없어. 암울하고 허탈하고, 구원이라고는 없지.”
“이성과 의지와 정욕이 회의를 열어 테이블을 에워싸고 열심히 토론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재미있지 않아?”
“괜찮아. 거기 오너 셰프가 우리 스포츠클럽 회원이고 나한테 개인 트레이닝 받고 있어. 메뉴 영양가에 대한 어드바이스 같은 것도 해. 내가 부탁하면 우선적으로 테이블 잡아줄 거고 가격도 한참 낮춰줄 거야. 그 대신 별로 좋은 테이블은 아닐 수도 있지만.”
“난 거기 벽장 속이라도 괜찮아.”
“이봐 덴고, 지금 잠깐 힘겨운 건 잊어버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자고. 이런 건 평생 동안 그리 자주 찾아오는 일이 아니야. 화려한 피카레스크 소설의 세계야. 각오를 단단히 하고 악의 냄새를 흠씬 즐겨. 급류타기를 즐기자는 말이야. 그리고 폭포 위에서 떨어질 때는 함께 요란하게 떨어져보자고.”
유전자 입장에서는 인간이란 결국 단순한 탈 것carrier에 불과하고 거쳐 가는 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에요. 그들은 말이 움직이지 못하면 또다른 말로 바꿔 타듯이 세대를 건너 우리는 타고 건너가지요. 그리고 유전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하는 건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행복하건 불행하건 그들은 알 바 아니지요. 우리는 그저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
“역사 속의 대량학살하고 똑같아.”
“대량학살?”
“저지른 쪽은 적당한 이론을 달아 행위를 합리화할 수도 있고 잊어버릴 수도 있어. 보고 싶지 않은 것에서 눈을 돌릴 수도 있지. 하지만 당한 쪽은 잊지 못해. 눈을 돌리지도 못해. 기억은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대대로 이어지지. 세계라는 건 말이지, 아오마메 씨, 하나의 기억과 그 반대편 기억의 끝없는 싸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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