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09년 여름

 

 

 

 

 

 

해열

 

        최문자

 

어머니가

 

약수저를 입에 대주면

 

고열은 고뇌 없이 무조건 내렸고

 

사랑은 억지로 식었다

 

뒤늦게 숟가락을 어둠 속에 버렸지만

 

깰 때까지

 

사랑은 언제나 미열로 미지근했다.

 

나는 나만 물들이는 약을 먹었고

 

아무 핏줄이나 흐를 수 있는 여린 박동을 사랑했다

 

심장으로 가는 길은 너무 좁았으므로

 

약 숟가락은 다시 필요했다

 

독한 약수저 때문에 해명되었지만

 

그는 내 안에서 짐을 꾸려 나가버렸다

 

내가 지워질 때 까지

 

그도 약을 삼킬 것이다

 

고열은 고뇌 없이 무조건 내릴 것이고

 

사랑은 억지로 식을 것이다.

 

그도.

 

 

 

 

 

 

 

 

 

딸그락 각시

 

               나태주

 

우리 집사람은 딸그락 각시

아침에도 딸그락

점심때도 딸그락

틈만 나만 부엌에서

딸그락거려요

 

밥하고 나물 삶고

찌개 끓이고 그릇 챙기고

설거지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남은 밥 모아 가스레인지에

누룽지도 만들어요

 

딸그락 딸그락

점심에도 딸그락

저녁때도 딸그락

딸그락 딸그락 소리 들으며

오늘도 기인 한 날이 저물어요.

 

 

 

 

 

 

 

 

 

 

아픈 천국

 

                   이영광

 

101동과 103동 사이 탄환처럼 새들이 빠져나간 자취가 몇 가닥 활로(活路) 같다.

 

세 들어 사는 자의 까칠한 눈으로, 나는 내가 먼 빛의 명멸을 봤다는 생각이 든다. 쨍한 무심결의 일순, 아연실색할 악착이 유리 같은 불안이 심중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깃털처럼 파란이 남아 아물대는 허공.

 

눈 그친 뒷산 잡목 숲이 생가지 분지르는 소리 이따금씩 들려오고

놀던 아이가 별안간 넘어져 크게 울고,

젊은 어머니가 사색이 되어 뛰어나오기도 한다. 다친 몸을 더 다친 마음이 뜨겁게 여미어 안고 간다.

 

실직과 가출, 취중 난동에 풍비박산의 세월이 와서는 물러갈 줄 모르는 땅,

고통과위무가 오랜 친인척 관계라는 곤한 사실이야말로 이 생의 전재산이리라. 무릎 꿇고 피 닦아주던 젖은 손 우는 손.

 

사색(死色)이란 진실된 것이다. 아픈 어미가 그러했듯, 내 가슴에도 창백한 그 화석 다발이 괴어 있어 오그라들고 까무러치면서도 한 잎 두 잎 쉼 없이 꺼내 써 마침내 두려움 없는 한 장만을 남길 것이다.

 

이 골짜기에는 돌연이었을 건축들 위로 출렁이는 구름 전함들이 은빛 닻을 부리고 한 호흡 고른다. 깨뜨리고 싶은 열투성이 의식 불명을 짚고 일어나, 멀고 높은 곳에 불현듯 마음을 걸어 두는 오후.

 

저 허공은 한 번쯤 폭발하거나 크게 부서지기 위해 언 몸 가득 다시 청색의 피톨들을 끌어모으는 중이지만, 전운(戰雲)이란 끝내는 피할 수 없는 것, 다만 무성한 속절의 나날에 대하여 나는

 

괴로워했으므로 다 나았다, 라고 말할 순 없을까.

살 것도 못살 것도 같은 통증의 세계관(世界觀) 가지고 저 팽팽한 창밖 걸어가면 닿을까, 닿을 것이다, 닿을 수 있을 것이다, 환청처럼 울리는 하늘의 먼 빛.

 

가시 숲에 긁히며 돌아오는 지친 새들도, 아까징끼 바르고 다시 놀러 나온 아이도, 장기 휴직 중인 104동의 나도 사실은 실전의 정예들,

 

목숨 하나 달랑 들고 참전 중이었으니.

아픈 천국의 퀭한 원주민이었으니.

 

 

 

 

 

 

 

 

 

지우개똥

 

             서하

 

어제는 달빛에 취해서

청송 교도소 무기수 그에게 편지를 썼다

한 장은 달빛이 쓰고

또 다른 한 장은 별빛이 쓰고

오늘 아침 다시 읽어보니

그의 쐐기눈썹 같은 글자들이

시들기로 작정한 꽃잎들처럼 버석거린다

 

동그란 지우개의 엉덩이로

근질근질한 근황들을 지그재그로 문지른다

여기저기 검은 빛 알갱이들

코스모스 씨 같은 말의 배설물들

온몸이 항문인 지우개도 똥을 눈다

자신의 살 헐어내고 있는지

엉덩이 우묵 들어간 달빛 냄새 자욱하다

 

 

 

 

 

 

고모의 젖

 

                  최금진

 

퉁퉁 불어터진 고모의 젖을 대접에 받아

늙은 할아버지가 그걸 마셨다

막걸리를 마시면 모자란 젖이 돈대요, 고모는

브래지어를 풀고 커다란 젖을 부끄러움도 없이 내놓고

막걸리를 마셨다

막 수염이 나기 시작한 나는 못 먹는데

혀에 암세포가 꽃 무더기처럼 핀 할아버지는 먹었다

눈이 그렁그렁한 어린 소처럼 받아먹었다

여자의 젖통을 밀크박스라고 농담했던 중학교 동창은

영안실에 누워서

흰 젖처럼 흘러가는 잠 속에 그의 어린 몸을 흘려보냈다

늙은 어머니는 백혈병 외아들의 입에

물릴 젖이 없었다

흰 피가 젖처럼 솟았다는 신라의 중 이차돈 역시

그의 어머니에겐 다만 철없는 어린애였을 것이다

아무리 어른이 되어도

그 몸 안엔 어린애가 들어있는 것이다

웅크리고 누운 할아버지가 밤새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그 무렵엔 또

집집마다 술을 담아 먹었는데

할아버지는 막걸리 한 사발에 삶은 계란 한 판을 다 먹었다

그리고 돌아가셨다

벌거벗겨지는 할아버지 가슴께에 돋은 젖꼭지가

작은 꽃봉오리 같았다

성경에 예언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다면

거의 필사적으로 젖을 핥아먹던 할아버지는

약속의 땅으로 흘러갔을까

젖비린내 나는 할아버지 혓바닥에

따닥따닥 붙어 발아하던 암세포들을 꽃모종처럼 담아

할아버지는 온몸에다 활짝 피워놓으셨다

젖의 힘이었다

마지막까지 암세포를 먹여 살린 것도 젖의 힘이었다

오열하는 고모를 붙잡고서

통통하게 살 오른 어린 조카가 빡빡 입맛을 다시며 울었다

 

 

 

 

 

 

 

전화

 

             이병초

 

날은 저물고 비까지 내리는데

울 엄니 전화도 안 받으시고 어딜 가셨나

밑 터진 비료 푸대에 목을 내고

양팔을 내어 비옷처럼 쓰시고

청닛날 밭에 들깨 모종하러 가셨나

고구마순 놓으러 가셨나

애리는 어금니 소주 한 모금 입에 물고 달래시며

거미줄이나 마중나온 길 허둑허둑 돌아오시나

큰아야, 집 뜯기면 어디로 간다냐 보상금타서

아파트로 간다냐 제발 물 안 나는 디로

두어 칸 앉힌다냐, 물으시더니

하늘님께 물음 뜨러 가셨나 손주 새끼들이랑

언제나 함께 사냐고 날 받으러 가셨나

꺽꺽 목이 쉬어

빗살은 앞뒷발 다 들고 쏟아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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