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아 이 무서운 백지는
오래 볼수록 백지가 된다
처녀를 오래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처럼
서둘러 손으로 발로
어렸을 때부터 묻혀와 혼나던 더러움으로
백지를 쓴다
백지를 벗긴다
소리 없이 깨끗한 밤
아니 깨끗해서 소음까지 순결하게 들리는 그런 밤
더러움에 혼날까 오히려 밤에 돌아온
나를 껴안아 눕는다
나는 백지 앞에 백지로 있을 수 없는 나약함
어둠 속에 어둔 채 있을 수 없는 심약한 광선
연필로 빛으로
글 쓰는 소리로
백지를 긋는다
밤에 나가 빛을 심는다
무언가 저절로 자라나길
기다릴 틈이 없는 것이 내 평생
겉에서 살다 겉에서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