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통해 강해질까
이민 박람회를 다녀왔다.
더 강해지려고, 더 앞서가려고 발버둥치다
문득 전혀 강해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강해졌다면, 스스로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생겼다면
이토록 피로할 리가 없다.
이민 박람회의 한 부스에서 뉴질랜드 취업 이민 상담을 받을 때
어떤 편이신가요? 활달하게 바쁘게 움직이는 걸 좋아하시나요?
라고 물으며 호텔경영 쪽 공부를 제안했을 때
아니오, 전혀, 이미 서울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데
굳이 뉴질랜드로 이민 갈 생각을 할 리가 없잖아요 라고 대답하는 중에
어쩌면 내가 불행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잘 다니던 직장 때려 치고
멋과 낭만과 돈에 대한 쪼들림과 여유 속에 살아가는 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작 내가 꿈꾸던 나라들(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네덜란드 등)의 부스는 없었다.
박람회장을 나오는 중에 미국 투자이민 세미나 부스를 지나치며 ‘어른들’을 느꼈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한 달씩 지나간다
달력의 하루를 나타내는 네모칸들을 일렬로 고속도로에 세워놓고
130km 정도로 밟고 지나가는 기분이다.
중간 중간 웃음소리와 외침, 와하하, 술잔 소리 등이 들리지만
누가 웃었고 누가 어떤 감정이었고 누가 어떤 표정이었는지를
차분히 기억해낼 수가 없다.
이 고속도로 끄트머리쯤에 오줌 누러 들린 휴게소에서
머리에 어렴풋 맴도는 그런 소리의 잔상들, 이미지의 잔상들에
혼란스러워하며 내가 지나온 저 뒤에서 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기억상실 증세를 겪을 지 모를 일이다.
혹은 의미상실증이랄까.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옮기면서
(잘 다니던? 이상한 말이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둘 리가 없지 않나, 그렇지만 역시나 누군가에게 설명하자면 잘 다니던 회사가 된다. 그러니까 잘 다니던 회사는 보통 견딜 만 한, 견뎌낼 수 있었던 정도의 의미가 아닌가 싶다.)
자연스레 내 능력도, 대우도, 인생도 shift up 하길 기대하게 된다.
그러면서 더 자신을 몰아치고 난 더 강해질 것이다 라는
세뇌에 가까운 주기도문을 외우기도 한다.
난 종교가 없지만, 모 종교의 원죄설을 적용해보자면, 인간이 받고 있는
가장 큰 벌은 ‘상승에의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그 상승이란 게
자신의 인생 몇 십 년을 통해 이루려 하기엔 허무할 정도로 조잡한데
그걸 눈치 채지 못하는 슬픔도 평생에 걸쳐 감내해야 하겠지.
(예를 들어 입사동기 200명 중 유일하게 본부장이 되었다. 그러기까지 30년이 걸렸다.
이런 게 대체 누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샤우팅을 사랑하는 동혁이 형처럼 간만에 신문을 보다가
한국 40대 남성들이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의 자녀에게 느끼는 친밀도가
40% 정도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한국에서의 이들의 삶이, 즉 직장생활이 어떠했으리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기사이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자녀, 13살 수철이는
13살에 이미 자신의 아버지와의 친밀도가 40% 대로 떨어졌다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이 모든 희생과 상실을 통해 우리는 강해지고 있다.
혹은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강해지자고 말한다.
만약 내가 외계인이라면(종종 그런 말을 듣기도 하지만)
내가 오늘 떠올린 이 경쟁적 성공욕망의 사람들을 보며
마치 지구 정복이라도 하려는 사람들인 줄로 알 것 같다.
고작 아파트 한 채 얻어보겠다고 저러는 줄로는
누가 100년을 설명해 줘도 깨닫지 못할 것 같다.
지금은 사람이라서
10.3% 정도는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