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복과 나

 

 

 

 

누가 만들어 어떤 헌법에 올려놨는지 모르겠지만

동방예의지국이었음을 내세우는

(그러나 동남아 노동자 등 특정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 없이 예의 없는)

대한민국에는

주법이라는 게 있어 음주 중에도 지켜야 할 법도가 있다.

(조선말기 양반이 5%였던 나라의, 다시 말해 95%가 법도를 모른다고

무식하다 천대받던 평민과 노비였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오늘날 술자리에서조차 법과 예를 찾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음주법이 있다면 음주옷도 있으면 어떨까 싶어 음주복을 만들었다.

주유원이 입는 주유복과 의사들이 입는 진료복, 수술복,

수영복, 레이싱복, 운동복, 잘 때 입는 잠옷처럼

술 마실 때 입는 음주복을 만든 것이다.

 

술 마시고 다음 날이면

술 마실 때 입었던 옷에서 냄새가 나고

때로 안주의 흔적이 묻어 있어 곤란하던 경험을 토대로

냄새가 베거나 웬만큼 오염이 되도 괜찮을 두툼한 재킷을 골라

왼쪽 가슴 부위에 음주복,

오른쪽 가슴 부위에 음주인이라 쓰고

지구 술 정복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 ‘전봇대’, ‘고래등 술과 관련된 오브제들을 그려넣었다.

 

나는 이 옷이 실용성에 있어서도

(과음으로 인한 지갑 분실을 막아주는 지퍼 주머니와

체온 저하를 막아줄 보온 성 등)

담배 연기와 안주 등의 오염물질에 닿아도 괜찮다는

심리적 안정성에 있어서도

이 음주복이라는 발상에 괜찮다는 평가를 내렸으며

그러므로 당연히 입고 거리로 나선다.

 

예상했던 것처럼 지나치는 행인들은 힐긋힐끗

나와 내 음주복을 쳐다보고

몇몇은 킥킥거린다.

나는 내 생각과 판단에 만족하므로 타인의 시선 따윈 아랑곳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응이 신경 쓰이며 일상복이라는 그림자 속에 숨어들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는 의아하다. 내가 강간죄를 지어서 그 얼굴이 공개되거나

낙인이 찍혀 그것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무엇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두려움을 느끼는 걸까.

 

내가 느끼는 두려움.

그건 아마도 다수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발생될 지 모를 오해가 아닐까 싶다.

사실은 똑똑한데 바보로 보이거나

사실은 진지한데 머리 빈 놈으로 보이거나

이해 못할 변태나 괴짜 못난 놈,

조롱꺼리로 찍힐까봐 두려운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바보고 멍청하고 못난 놈이라는 진실이 드러나는 게 두렵거나)

 

사실 이런 류의 오해들 중, 가장 심각한 것을 골라 봤자

똘아이별종일 텐데, 그런 걸 이토록 두려워하는 걸 보면

우리가 타인으로서의 별종이나 똘아이에게 얼마나 강력한 폭력의 시선을

평소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친구들 중에 별종, TV 등을 통해 이미 영웅화된 별종이 아닌 이상,

나와 별 상관 없는 타인이 별종일 때 사람들의 시선은 이를 결코 곱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모앙이다.

 

그러니 무려 2천만 명이 거주하고 위성도시 등을 통해 유입되는 인구까지 포함해

하루 3천만 명 가량이 살아 움직이는 거대 도시 서울에서도

새로운 생각이나 시도를 하루 열 번도 보지 못하는 것일 테다.

2천 만 명이 1년 중 단 하루, 단 한 번만 재밌는 생각을 하고

재밌는 생각을 표현하더라도

2천만 나누기 365한 수만큼의 재밌는 일들이 매일 서울에서 일어난다.

게 중 백수나 나처럼 뭔가 매일 답답함에 질려가는 인간들은

1년에 서른 개 정도는 특이한 뭔가를 만들거나 행할 것이다.

그런 도시를 상상하면 행복해진다.

 

술자리가 있는 날 저마다 자신의 음주복을 만들어 입고 와서

둘러앉으면 어떨까 궁금하다.

타인을 무시하는 건 나쁜 일이지만

그 타인이 익명의 다수이고, 그들이 암묵적으로 일관된 생각과 행동을 강요할 때

그 타인을 무시하는 능력은 덕목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부모나 친구를 무시하거나

신장개업소 앞의 도우미 언니들이나 유흥업종사자,

노숙자, 어린이님들을 무시할 때가 있다.

기왕 무시할 바에야 한국 교육체계를 통해 구별지어진 사회적

비성공계층 중 일부를 무시하느니

그냥 나를 제외한 모두를 무시해보면 어떨까 싶다.

 

 

Ps. 잘 안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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