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닦기
한밤에
새벽 한시에
자위를 한 뒤
구두를 닦는다
밤의 한 복판을 푹
찔러
희멀건한 어둠으로
빛 나간 검정으로
18만 5천원어치 곡선을 채운
소가죽에 기도하듯
검정을 문질러댄다
검정 검정
검정 감정이
검은 소를 때리고
움- 푹 파여
스러진다
내일도 빛 뒤에
사생아처럼 숨어
돌아다닐 준비를 하는
이제 좀 반질거리는 밤은 낮의 뿌리
지난 천 년이 내일 하루의 뿌리다
언제쯤 사정 없이 잠들지 모르겠으나
빈 정낭으로 구두를 닦는다
밤을 닦는다
뿌리를 캐내어
뒤집어 말리고 싶다
너의 무릎
나는 이 세상의 그림자
부서진 꿈들의 인수분해
연주된 지 25년 지난 바이올린의 감퇴된 식욕
지하철에 두고 내린 김치
죽고 난 뒤 나오는 보험금
죽고 난 뒤 나오는 보험금 계약서에 싸인하는 중년인의 무기력한 힘줄
하품하는 여자의
자신은 맡을 수 없는 썩은 내
집 나가서 여섯 달 째 소식 없는 이력서
범고래 아가리에 체크무늬 수놓는
철그물의 존재와
매일 소젖을 먹는 남자
자 이제 누군가 내게 말해다오
내가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라고 물어본 일 없는 입술
복사기에 끼어있는
이면지 같은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막 밖으로 내내 튀어나와 있는
그녀의 무릎
조약돌처럼, 가슴을 흐르는 강에 놓인 무릎
내려다보면 내가 물새가 되는
찰랑이고 물고기 같은
너의 무릎
나의 무릎
제주도에선 바람이 불고 무릎이 아팠다
날이 차고
비와 안개가 날았다
아픈 무릎으로 절물* 주위를 걷는 동안
지구의 무릎은 어디일까 궁금해졌다
존댓말과 반말 사이
무릎은 어디쯤일까 궁금해졌다
무릎은 이응일까 디귿일까 피읖일까
달력이거나 일력
상처일까 마디일까
꿇는 과정일까, 생각하는 동안
한라산은 구멍 숭숭 난 몸을
야자나무 둥치에다 부수수 부비고
무릎 놓고 내려온 바람이
거지처럼 주저앉아
바닥에 잎사귀 몇 개 깔아놓는다
무릎 관절에 단단히
떳떳함을 드라이버로 쪼여놓고 싶은데
덜컹 목이 쳐 날라가는 자음들
지구 위에 맨들거리는 이응들
산에서 캐낸
옛 의병 다리 매달아 놓은 듯
웅 웅 삐걱
고향집 바람에 문 닫혔다 열리는 소리
* 제주도의 한 지역. 절 옆에서 솟는 물에서 유래.
가을
병든 낙엽을 밟으며
병이 옮아 오기를
산이 낮아 지기를
날이 짧아 지기를
새가 무거워 지기를
기도했다
기도가 막혀 죽어가는 여자를
강간하는 만화책을 보며
이 책을 빌려 집으로 오는 동안
내가 이미 지고 있음을 알았다
습관처럼 축 처진 가을이
몇 번 쓰다듬어지다 버려지고
일부는 공동묘지에
일부는 등산객의 신발 밑창에
곱창처럼 씹혀 나와
겨울을 부른다
어차피 아픈 거
다같이 아프자는 거다
다같이 아프자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