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확장
컵에는 예쁜 컵도 못생긴 컵도 없다.
컵은 그냥 컵일 뿐이다.
다만 그 컵을 이쁘거나 못생겼다고 구분하는
이쁘거나 못생긴 마음이 있을 뿐.
예쁜 것이 좋아서 예쁘게 살고 싶어서
더 예쁜 것을 찾고
예쁜 것들의 순위를 매기고
덜 예쁜 것들을 따로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때때로 그들이 그들의 기준에서
못생긴 것을 보았을 때 드러내는 태도, 혐오감,
비난, 무시하는 감정의 형태나 색감은
그들이 못생겼다고 평하는 컵이나
구두만큼이나 못생겼다는 느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예쁘지 못한 것들을 구분하고 차별함으로 인해
그 자신을 호들갑스럽고 못나게 만든다.
가끔은 생각해보라, 추상화를 그려보라.
무시하고 깔보고 한심하다는 듯 무언가를
바라보는 자아는 얼마나 예쁜 색과 형태인가.
그런 삶과 문화의 태도는
포인트가 “예쁘게”에 있는 게 아니라
“욕망”에 맞춰져 있다고 보여진다.
만약 굳이 예쁜 것과 못생긴 것의 구분을 나눠야 한다면
예쁜 것의 기준은
‘예쁜 것을 확장하는 능력’에 두어야 한다.
만약 어떤 대상들의 미추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진짜 예쁜 마음인 거라면,
진짜 예쁜 컵이나 진짜 예쁜 가방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가방은 모든 가방이 다 아름다움을
컵은 모든 컵이 다 아름다움을 말해줄 수 있을 때
진정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