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마른 행주 위에

젖은 칼을 눕혀두고

구하라를 생각한다

사과를 깎아놓은 듯한 이마와

백사장 반짝이는 고운 이빨들과

비키니 같은 입술을 생각한다

칼은 취한 피가 흐르는

혈관을 뛰놀고 싶어

모로 누운 채 오늘도 금식한다

연예 프로그램들도 그런

하부의 앵글을 좋아한다

물빨래한 좀비들처럼

베란다 건조대는 마르면서 살아난다

그 엉덩이 가득한 세계에 구하라가

구하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살아간다는 데

죄책감이 든다

잔뜩 널린 빨래 비린내에

벌레처럼 굼틀거리며

칼을 지나

칼을 돌아

구하라의 허리벨트를 생각한다

조명 기계 아래 묶여 있는 구하라와

그녀의 첫사랑 국어선생님 머리 밑에

떨어지던 애기 벚꽃 잎의 분홍 혈관을 생각한다

꽃잎 질 때의 죄책감을 꼭꼭 씹으며

앞뒤로 먹어대던 점심 도시락을 떠올린다

달리다 멈추면 나를 밀치고

모두가 앞으로 도망가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칼을 쥐고 사과를 깎는다

붉은 입술이 사랑스런 사과

떠나온 계절을 먹고 도톰해진 밤에

칼이 들어간다

칼이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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