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SURI), 나카무라 후미노리, 자음과 모음, 2010(초판3쇄)
오른손의 중지와 검지를 코트 안주머니에 넣어 지갑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때, 남자의 온화한 표정과 그 너머에 있을 터인 그들의 부드러운 생활에 내 손이 닿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매치기한 지갑에 자신의 사인 카드를 넣어 다시 돌려준 괴짜도 있었어. 도손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소매치기.”
“하지만 실제 파멸은 그런 추상적인 게 아니야.” 그녀는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파멸에는 항상 시시한 형식이 있어. 시시해빠진 현실적인 형식이 따라붙어.”
“누군가 부른다든가 아니면 뭔가 큰 소리가 났을 때, 인간의 의식은 대부분 그쪽으로 쏠리게 돼. 방금 너도 노숙자에게 정신을 빼앗겼어. 인간의 의식에는 한계가 있는 거지. 좀더 말하자면, 숨을 들이쉴 때와 멈출 때는 민감하지만, 내쉴 때는 풀어져버려.”
아이는 내 옷자락에 시선을 던졌다.
“소매치기는 그런 인간의 의식을 이용하는 거야.”
“이런 인생에서 가장 올바른 삶의 방식은 고통과 기쁨을 잘 구분해서 쓰는 거야. 모든 것은 이 세계에서 부여하는 자극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그 자극을 내 속에서 잘 혼합해야 제각각 다른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어. 네가 만일 악에 물들고 싶다면 결코 선을 잊어서는 안 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여자를 보면서 실실 웃는 것 따위로는 시시하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여자를 보면서 딱하다고 생각하고 가엾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괴로움이나 그녀를 키운 부모에까지 상상력을 발휘해서 동정의 눈물을 흘려가면서, 그러면서 좀 더 큰 고통을 가해야 해. 정말 기막히게 멋있지, 그 순간은!”
“죽음의 공포를 의식적으로 즐기란 말이야. 그걸 할 수 있을 때, 너는 너를 초월할 수 있어. 이 세계를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 나는 인간을 끔찍하게 죽인 직후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고, 길 가던 아이들이 웃는 얼굴을 보고 아, 참 귀엽구나, 생각할 수 있어. 그 아이가 고아라면 도움을 줄 수도 있고 갑작스럽게 죽일 수도 있어. 아아, 가엾어, 라고 생각하면서! 신이나 운명에 만일 인격과 감정이 있다면, 이건 바로 그 신이나 운명이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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