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7일
나 같은 속물을 꽤 많은 사람이 좋아해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을 것 같이 말하지만
좋아서 감사해서 하는 말이다.
나는 마치 내가 속물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랬으면 싶은 바람에 그런 척해보는 거다.
사실 지금 같은 시대에 지금 같은 사람들에게
속물이란 딱히 나쁜 개념도 아니다.
심지어 요즘 교회에서는 선하고 신앙심 깊은 이들이
돈도 많이 번다는 식으로 가르친다고 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거라고.
하… (이런 말을 들을 때 나는 정말 구원이 필요하다 제발 누가 날 이곳으로부터 구해주세요)
말세는 말세인데 말세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 중 하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안다.
내가 부자인데 그런 얘길 듣는다면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것인지…
beauty
블랙스완을 봤다.
무슨 말이 필요 있나. 또 하나의 걸작 탄생.
그 목격자 중의 하나로서
나는 이 영화의 관람 포인트를 beauty에 둔다.
그런 아름다움 있지 않은가.
예뻐요 아름다워요 눈부셔요 그런 거 아닌
절라 아름답네…
울컥 하는 아름다움.
올해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사실상
6분의1이 지났다.
작년1월 이것 저거 써서 벽에 잔뜩 붙여놓은 것들을
지난1년 동안 몇 번이나 유의 깊게 보았는지 모르겠다.
한 번 정도?
뭔가를 적어 벽에 붙여두는 것의 단점은
붙여둠과 동시에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적어 붙여두니까 난 잊지 않을 거야.
매일 이것을 바라볼 거야.
라는 생각으로 그 생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연애에서도 비슷한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내가 알랭 드 보통 같은 사람도 아니고 그쪽에서 그런 사례들을
풀어 써놓고 싶진 않다.
여행 갈 때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 종종 그렇게 된다.
이것도 찍고, 저것도 찍고
카메라에 정신이 팔려
내가 본 것들 생각한 것들 이미지들이 이 안에 다 남을 거라고
방심하는 순간 그것은 묻혀버리고 죽 어 버린다.
벽에 붙여놓고 1년간 그것과 함께 살았지만
뭐라고 써놨는지도 기억 못하는 것처럼.
카메라를 새로 샀다. 똑딱이.
뭘 찍을까를 탐색하느라 매일 가지고 다니며
이것 저것 찍어본다.
시에서도 뭘 쓸까를 10년 째 찾지 못하고 있는데
이건 또 다른 도피가 아닐까 싶은데
어느 정도는 맞다.
아니 많이 맞다.
나약하고 여리고 이기적인데다 나이까지 들어버린 백조.
언제나 그렇듯 타인의 영역은 쉬워 보인다.
커다란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레스토랑 반찬 같은 거 찍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 더 그런 자신감이 든다.
하지만 영화와 마찬가지겠지.
영화를 잘 모를 때는 나도 저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만들 수 있겠다 싶지만
20여 년을 정독(마땅한 용어가 떠오르지 않아서)하다 보니
아 나는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없겠구나 싶은 대단한 영화가 너무 많다.
사진도 내공이 생기면 내가 보이기 시작할 거다.
아 난 여기구나 싶은.
너의 적은 바로 너야. 너 자신을 버려.
뱅상 단장이 니나 포트만에게 하는 말인데
그게 누구에게나 해당이 되는 말일 거다.
그래도 아직은 이런 말에 연연하는
해당 되는 사람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좀 더 살아도 되겠다.
어쩌면 기대도 해봐도 되겠다.
일도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
좀 더 빠져들면 새로운 게 보일 거다. 거기서 보게 되는 게
꼭 좋은 거리란 보장은 없지만 어차피 지금이 perfect도 아니지 않는가.
It was perfect… 내가 영어를 잘했다면
무대에 쓰러진 니나가 했던 대사를 제대로 들었을 텐데.
니나의 목소리 + 완벽했어요(자막/의미)로 들려서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목소리의 감정과 완벽했어요 라는 뜻의 어떤 발음.
눈물이 찔끔 났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아름다워서 그랬다.
이 영화 한편에 담긴 무수한 감정과 노림수 의견들 정보들
와중에서 beauty로 정리해 받아들이기로 한데 대해 만족한다.
광고에서의 컨셉 뽑기와 비슷하다.
무수한 단초들과 정보들 가능한 의견들 가설들
그 와중에 어쨌거나 최종의 하나를 정해야 하는데
그것은 결국 마지막에 가선 뽑기의 영역이다.
가위 바위 보 셋 중에 하나를 내듯이
초등학교 앞 고무줄 제비 뽑기를 하듯이
결국은 그 영역의 연장선에서 서른 몇 년 살아온 어른들이
이맛살 찌푸리며 말을 뿌리고 고민을 하고
고민하는 척을 하고 피곤해하고 뻐근해하고 후줄근해진다.
갓끈이 달린 조명등을 한 번 살짝 잡아당기면
딸깍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듯이 (암흑으로 혹은 빛으로)
뽑기를 닮은 진지하고 피곤한 일상도
딸깍 어떻게 보면 하찮고 무의미하게 변해버린다.
결국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인데
당연히 내게 편하고 유리하고 현실 조건에 타협 가능한 쪽으로
보아지게 된다.
그런 게 이제 속물적인 건데.
어떻게 유의미하게 이롭게 아름답게 볼 것인가가 아니라
이게 정말 의미 있는가 어떤 의미인가 어떤 가치인가를
고민하는 쪽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를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정작 우리가 하는 일 자체가
어떤 상품에 대해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인데
정작 우리 일 자체에 대해서는 그런 판단을 끊임없이 유보한다.
왜냐
어쨌거나 나는 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속물
이beauty한 것을 보고 울었다.
니나가 그립다.
내가
내가 되고싶은 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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