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끄고 비를 듣는다.
아침에 만화책을 읽으며 똥을 싸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엉덩이를 닦아내며
내 정신은 온통 만화책 속에 빠져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똥을 다 쌌다는 사실을 지각하고 닦아내고 있는 건가,
란 생각이 들었다.
손처럼 감각적이지도,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내장 기관이 알아서 제 할 일을 마치고
다 쓴 카피를 기획에게 던져주듯
일 끝났다는 메일을 내 뇌나 손에게 던져주었다는 사실에
뭔가 대견함을 느낀다.
우주형제 10권이 나온 기념으로
1권부터 다시 한 번 읽고 있는데
오타쿠처럼 한 줄 한 줄 곱씹으며
먹어버릴 듯 읽지는 못하는 나 자신이 안타깝다.
예전 영화 수업을 들을 때 교수 왈,
'한번 본 영화는 그냥 길에서 스친 사람 같은 것'이라고 했다.
최소한 3번 이상 보기 전에는 영화를 봤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불행히도 요즘은 매주 월요일마다 회사에 가면, 주말에 한번 스친 영화들을 봤다고 떠들어대고는 한다. 반성한다.)
한창 만화에 빠져있을 때는
왠만한 만화는 전부 3번 이상씩
훌륭한 만화는 열 번 이상씩을 다 보고선 또
볼 거 없나 매일 만화가게를 들락거렸는데
이젠 어느새 만화책 사는 돈도 신경이 쓰인다.
오타쿠의 대단한 점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직장에 다니고 한달에 100만원 이상의 소비를 하는 나같은 사람도
만화책 구입 3만원, 4만원 하는 돈이 부담이 되고
한 번 보고 말 거 살 거 있나, 이런 식으로 생각/행동하게 되는데,
오타쿠들의 경우, 한달 생활비가 30만원인 경우에도
3만원, 4만원을 만화책 구입에 쓰는 것이다.
이런 경우, 난 이들이
오히려 나보다 더 부자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다른 즐거움들, 피자/햄버거/약속/술자리 등을 포기하고도 얻을 정도로 큰 소중함을
어쨌거나 키우고 지켜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화책이라는 비현실적 품목에 그토록 빠질 수 있다는 건
분명 그들의 몰입능력이나 상상력의 수준이 꽤 높다는 반증이다.
나이가 들면서 타인에게서 부러움을 느끼는 종류는
돈이나 재산, 외모보다도
어느 하나에 푹 빠져 살 수 있는 열정과 에너지다.
그리고 미녀 여친을 둔 놈들도 좀 부럽다.
어제는 한국식 영어로 슈퍼문, 외국식 영어로 수퍼문이었는데
달이 지구와 가장 가까워지는 날이었다고 해서
술 한 잔 마시고 벽에 기대
저 달을 저 달을 저 달을 노래를 부르며 보았다.
기분 탓인지 정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어떤 만화에 보면, 주인공이 달을 보며 어 저게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데 진짜로 주인공 코앞까지 가까워져서 피떡을 만들어버리는 장면도 있었다.)
오늘은 지지난주 다 읽은 로버트M.피어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스크립트 해야되고
또 <우주형제>와 함께 사온 <진격의 거인>과 <도로헤도로>를 봐야 하고
<커팅엣지에디버타이징>도 좀 읽어두고 싶고
1박 2일도 봐야하고
피자헛 아이디어도 좀 내야하고
다시 한 주를 위해 잠도 좀 자둬야하고
할 것들이 많아 여유로운 일요일이다.
일이 바쁠 때면
빨래도 책도 청소도 생각도 아무 것도 못하는데
오히려 온전한 일요일엔
이것저것 할 것들이 많다.
음악을 끄고 창문을 열어둔 건 잘한 일 같다.
여기저기 빗방울 부딪치는 소리들 속에 리듬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분명히 지구/자연엔 리듬이 있다.
신림동 원룸촌에 살더라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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