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3단 합체 로봇도 아니고
파시즘에 중독된 나치당원도 아니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일관된3단 논리를 갖고 있다는 건 불편하다.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한다.
사람은 가정이 있어야 하니까.
아이를 낳아야 하니까.
그나마 요즘은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한다.
사랑하니까.
라는 무지막지한 논리는 거의 사라졌고
그보다는
‘결혼을 해야 하니까 마땅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와
‘안정된 가정을 만들기 위해 결혼한다’ 쪽으로
좀 더 솔직한 논리가 공유되고 있는 추세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결혼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제1원인은 아니라는 것이고,
그보다는 ‘결혼’이 제 1원인이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
결혼하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다.)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이혼 경험이1번 이상인 사람이
50%가 넘는다는 미국의 경우나
결혼이라는 제도가 태어나게 된 배경부터
줄줄이 떠들 체력은 없고
훌쩍
훌쩍
결혼에 대한 생각을 뛰어 넘어
아이
아이를 왜 가져야 되나 라는 생각부터 써본다.
아이는 왜 가져야 되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본능’을 제외하고?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야
이 본능이야말로 신이 주신 것이고
그러므로 본능에 따라 아이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겠지만
나로서는
그 신이라는 분이
아이를 갖고 싶은 욕구 외에도
지배욕 폭력 파괴욕 탐욕 이기심 등
너무나 많은 욕구를 주셨는데
그 모든 욕구를 다 따르진 않는 것처럼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구도 꼭 따라야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구 이면에는
내가 죽을 것이다 라는 절대 사실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구는
죽고 싶지 않다는 근원적 욕구와 맞물려 있다.
그렇다면,
내 아이에 대한 생각 이전에
나라는 사람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있어야 될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왜 존재해야 되는지에 대한 답이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면
아이도 왜 낳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낳고싶어 낳아야 한다면
지난 몇십년 동안 느껴왔지만
여전히 또
어떤 프로그램된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벗어버릴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세상엔 존재해선 안 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 존재해선 안 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다른 인간들의 공공의 적이 될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왜냐? 세상엔 현재 60억의 인구가 있는데, 이들이 존재해야 하는 60억 개의 이유가 있을까?
엄밀히 말해 이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모든 인간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전제가
60억이면 60억 70억이면 70억 막연히 적용된 것일 뿐이다.)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해도 되는 사람이 된 것이지
존재해야 되는 유형의 사람이 있어서
존재해야 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치면 어디서부터가 사람인가– 뇌사/식물인간/기형/복제인간/장기이식/인공장기/두뇌이식 등등- 의 정의부터
내려져야 하는데 당근 누구도 합리적으로 인간의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인간에 대한 가치’ 혹은
‘인간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저 막연히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납득하는 것이지
조만간 70억에 이를 지구인
000씨000씨000씨 그70억 모두를 알아서
하나하나가 존재해야 된다고 납득하고 있는 건 아니다.
실제로 매초마다 생명이 태어나고 죽어가지만
대부분은 그 대부분의 인간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인간이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정의를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실제 살아있는 개성(인간)에게 적용된 정의는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정의 자체가
괴상하지 않은가.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우주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이 사라지면 자신의 우주도 사라지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제외하고
내가 존재해야 하는 가치를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
누군가의 아들이기 때문에, 형제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은
굳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여도 000씨의 아들이고 형제라면
존재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적확한 이유가 되지 못하는 듯 하다.
예를 들어,
김지혜라는 40대 여자에게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00000001한 미소를 짓고 00000001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00000002한 미소를 짓고 000000002한 생각을 하더라도 김지혜라는 엄마에겐
가치가 있기 때문에,
즉, 당신이어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아들’이어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들’인 당신이 존재해야 하는 가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뿐
‘당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지구라는 무대에
굳이 반드시 꼭 존재해야 하는 지에 대한 확신과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또 나의 유전자와 나의 환경을 물려받은 아이를
나아야 한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다.
순전히 본능적으로
혹은 남들의 가정이 행복해 보여서
나도 가정을 갖고 싶어서
내 아이가 보고 싶어서
라는 이유로 아이를 낳을 경우
내 입장에서는 이 아이라는 존재가 다분히
‘수단’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요소로서의 존재
내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존재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를 채우기 위한 존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낳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로 아이를 ‘필요로’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이가 필요해서 낳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이것이 명쾌하고도 찔림 없는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나에겐 이것이 대단히 미안하고 거북스런 이유로 느껴진다.
지금으로부터
일주일만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집에 처박혀 있는다면
나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평소처럼 지낸다면
약 자장면 21그릇 정도의 열량을 섭취하며
다음주 일요일까지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내 존재라는 건 그런 것이다.
자장면 21그릇을 먹을 수 있냐 없느냐에 따라
성립되거나 성립하지 않는 존재.
아마도 나는 그 점이 불만스러운 것이고
그보다 좀 더 만족스런 내 존재의 이유를 찾고 싶은 것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가족에서 찾게 되는데
바꿔 말하면 가족 정도 밖에는 나의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가족끼리 넌 나에게, 난 너에게
그런 식으로 존재의 가치를 이어가는 것이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아이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냄으로써
동시에 그로부터 나의 존재도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분명히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직시했을 때,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나’를 위한 일인지를 알게 됐을 때
아기를 낳는다는 것에 대해
새로운 존재와 우주, 혼돈을 창조해낸다는 것에
충분한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은가
충분한 머리굴림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