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하수인
삶과 죽음 모두에 쫄아있다
라고 쓴 글을 읽는 순간
삶에 대해 새로운 용기가 생기는 것은 신기하다.
삶이 늘 그 삶의 주인을 상처 입히는 건
어쩌면 삶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이 주인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에겐 삶 밖엔 없다.
혹은 예정된 죽음.
삶에게 상처 입었을 땐 삶으로부터 위안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런 때 언어가 위안을 준다는 것이 신기하다.
삶과 죽음 모두에 쫄아있다고 적힌 글을 본 순간.
정말 그런 내 모습과 내 삶의 풍경을 인식한 순간.
어떻게 좌절하거나 초라해지지 않고
오히려 위안과 오기를 얻을 수 있는 걸까.
또한 평생 나를 위로해 준 적 없는 삶을 대신해
언어가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그 힘의 원리는 무얼까.
언어는 삶을 구조화 하고,
삶을 형태화하며 인식하도록 만드는 기호이지만,
동시에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냉철한 제 3의 관찰자일 텐데.
나는 그 비밀을 모른다.
언어가 사람에게 힘이 되는 원리를.
그래서 내 글이 누군가에게 힘이 될 때는 순전히
우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경우다.
아 불현듯 그런 생각은 든다.
언어가 내 삶의 일부를 비췄을 때,
아무도 깊이 관심 가지지 않는 내 삶의 그늘진 골목을 비추었을 때,
내 삶을 나 혼자 기어가고 있진 않구나 라는 느낌.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고,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고 있구나 싶은 느낌.
저마다 자신의 삶에 치여 남에게 그런 깊은 비춤을 주기 어려울 때,
어쩌면 사람들이 그런 비춤을 갈구하는 대상은 신.
신이란 그런 건지도 모른다.
당신만은 모든 것을 알고, 당신만은 나를 인정해주고,
당신만은 언제나 나를 지켜봐주시고…
언어의 피곤함은 그것이 언어화 되어 나를 비춰볼 때만 존재한다는 것이고,
결국 그 언어 또한 내 스스로 만들거나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고,
반면 신과 달리 언어의 다행함은
그것이 때때로 출현하며, 나와 대면의 순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결코 내가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는 법이 없는 신과 비교할 경우,
그래서 어쩌면 언어는
신의 하수인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신의 하수인은 말하는 것이다.
너 삶과 죽음 모두에 쫄아있다고.
그러면 나는 이러는 것이다.
아, 그럼 어디 두고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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