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2012(세계문학판 26쇄)
이 개자식은 지갑을 꺼내어 터키 놈들에게서 빼앗은 금화를 주르륵 쏟아내더니 한 주먹씩 공중으로 던지는 겁니다. 두목, 이제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갔더니 아흔을 넘긴 듯한 할아버지 한 분이 바삐 아몬드 나무를 심고 있더군요. 그래서 내가 물었지요. <아니, 할아버지 아몬드 나무를 심고 계시잖아요?> 그랬더니 허리가 꼬부라진 이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리며, <오냐, 나는 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란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 갈래의 똑같이 험하고 가파른 길이 같은 봉우리에 이를 수도 있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그러나 조르바가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데 식전부터 그는 흐릿한 눈으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훤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잠이 덜 깬 것임이 분명했다. 조용히, 애무하듯이 그는 꿀처럼 짙고 느린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대지, 물, 생각 그리고 인간의 전 우주가 먼바다로 흘러들고 있는 것 같았다. 조르바는 저항도, 질문도 하지 않고 행복하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음습한 땅속의 두더지처럼, 구(球)형의 머릿속에 갇힌 채 두뇌는 쉬고 있었다. 나는 대지의 속삭임과 입놀림 그리고 미동까지 놓치지 않고 감청할 수 있었고, 비가 내리면서 씨앗이 불어 터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하늘과 대지를 남자와 여자처럼 맞붙어 아이를 낳던 시절의 하늘과 대지로 느낄 수 있었다.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면서 해안을 덮쳐 핥아 갈증을 달래는 바다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늙은 육신 속에 그 몸을 들어다 어둠 속에 유성처럼 던져 버리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영혼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꽤 오랜 시간 잠을 청하려고 애쓰며 생각했다. 내 인생은 한갓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걸레를 찾아 내가 배운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다른 길로 들어설 것인가! 내 오관과 육신을 제대로 훈련시켜 인생을 즐기고 이해하게 된다면!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어휴, 부활절에 흔들거리는 저 교회의 종 같은 엉덩이라니! 나는 자신을 꾸짖었죠. <이 병신아, 광산엔 뭣하러 가. 뭣하러 풍향계처럼 뱅글뱅글 돌면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해? 여기에 광산이 있지 않느냐? 뛰어들어 갱도를 열면 되는 걸 가지고!>
이즈음의 내 행복도 그렇다네. 나는 내 키높이를 열심히 재고 있다네. 자네도 알겠지만 사람의 키높이란 늘 같은 게 아니라서 말일세.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네!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부르고 있는지도,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거예요.』
『일할 때는 말 걸지 마슈! 뚝 부러질 것 같으니까.』 『부러지다니, 조르바, 그게 무슨 말이오?』 『또, <무슨 뜻이냐, 왜 그러냐>하시는군. 꼭 애들같이! 그걸 내가 무슨 수로 설명해요? 나는 일에 몸을 빼앗기면, 머리꼭지부터 발끝까지가 잔뜩 긴장하여 이게 돌이 되고 석탄이 되고 산투르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두목이 갑자기 내 몸을 건드리거나 말을 걸면 돌아봐야죠? 그럼 곡 부러져 버릴 것 같다는 말입니다. 이제 아시겠어요?』
생각에 잠긴 채 나는 길을 따라갔다. 나는 인간의 고통에 따뜻하게, 그리고 가까이 밀착해 있는 이들을 존경했다. 오르탕스 부인이 그랬고, 과부가 그랬고, 슬픔을 씻으려고 바다에 용감하게 몸을 던진 창백한 파블리가 그랬고, 양의 목을 따듯이 과부의 생멱을 따라고 고함을 지르던 델리(카테리나)가 그랬고, 남들 앞에서는 울지도 말도 하지 않던 마브란도니가 그랬다. 나 혼자만 발기 불능의 이성을 갖춘 인간이었다. 내 피는 끓어오르지도, 정열적으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했다. 나는 모든 것은 팔자소관이라고 주장하면서 겁쟁이로 사태를 바로잡아 보려고 했던 터였다.
우리는 나날의 걱정으로 길을 잃는답니다. 소수의 사람, 인간성의 꽃 같은 사람만이 이 땅 위의 덧없는 삶을 영위하면서도 영원을 살지요.
조르바는 자기 무릎 위에서 떨고 있는 부불리나의 통통한 손의 축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르바의 무릎은 천 번하고도 한 번 더 난파했던 그 가엾은 여자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한 치의 땅이었다.
당신이 어디를 만지든 나는 소리를 지를 겁니다. 내 몸은 상처와 흉터와 옹이투성입니다.
『......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론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우린는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순간순간 죽음은 삶처럼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봄이면 선남선녀들은 4천년 동안이나 신록 아래서(포플러나무 밑에서, 전나무 밑에서, 떡갈나무, 참나무, 플라타너스, 키다리 종려수 밑에서) 수천 년을 더 그렇게 출 터였다. 그들의 얼굴은 욕망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 얼굴이 바뀌고 허물어져 흙으로 돌아가도 다른 얼굴이 나타나 뒤를 잇는 터였다. 춤추는 자는 하나지만 얼굴은 수천이었다. 나이는 늘 스물, 불사신이었다.
나는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 이따금 눈물이 내 앞을 가렸다. 이게 인생이거니...... 변화무쌍하고, 요령부득이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러나 마음대로 안 되는...... 무자비한 인생....... 무지몽매한 크레타 농사꾼들은 지구 저쪽 끝에서 온 퇴물 카바레 가수를 둘러싼 채 자기네들은 인간이 아닌 양 죽어 가는 걸 지켜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흡사 온 마을 사람들이 해변으로 몰려와, 하늘에서 떨어진 낯선 새가 날개를 부러뜨리고 퍼덕거리며 죽어 가고 있는 꼴을 구경하는 형국이었다. 부인이 늙은 공작새, 늙은 앙고라 고양이, 병든 물개나 되는 것처럼.......
『좋아요......』 그가 구겨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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