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시작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X이토 히로미, 학산문화사, 2009(초판)

 

 

 

 나는 자연을 헤치며 걸어가는 것이 왠지 가슴 벅찼다. 눈앞의 거미 한 마리도 어쩌면 이토록 완벽한 나선형 집을 짓고, 어쩌면 이토록 선명한 색을 띠고 있을까. 색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나. 평소 생활에서 내 마음 속의 색깔이 얼마나 협소했는지 통감할 수 있었다. 느긋하게 걷는 동안 나 자신의 감각이 점점 열려간다.

 

 

 

이노우에: 하지만 지금이라면 감독을 좀 더 잘 그릴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고교 운동부 학생들의 느낌 같은 걸 지금 그려낼 자신은 없군요...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 할가 가치관이 다양해져서, 이 아이들처럼 '반드시 이긴다!'라는 의지를 스스로 믿을 수가 없어져요.

 

 

 

이토: 말도 안 되는 이름이다 싶지만 '사쿠라기 하나미치(벚나무가 늘어선 꽃길)'라고 써 놓으면 그럴듯해 보인단 말이에요. 거기서 받는 인상은 좋은 성격... 긍정적이고 밝고 구김살없고, 아무 컴플렉스도 없고, 약간 바보스러운 면도 있으면서 모두에게 호감을 산다는 인상이 들어요.

이노우에: 이 이름을 떠올렸을 때, 지금까지 아무도 써먹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이토: 굉장한 이름이에요. 여기에 어깨를 겨룰 만한 거라면 『거인의 별』의 주인공 호시 휴마(별로 날아가는 숫말) 정도일까?

 

 

 

이노우에: 역시 세부묘사에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 신경이 가는가'하는 점이 그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려야 하므로 보는 사람은 다르겠죠. 실제로 제가 그러니까요. 『리얼』을 그리면서 휠체어 농구를 해본 적은 있지만, 저는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그러면 기존에 하던 농구처럼 묘사할 우려가 있죠. 휠체어 농구는 휠체어 농구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부분은 아직 그려내질 못하고 있어요.

 

 

 

이노우에: 그렇죠. 만화를 그릴 때는 아무리 단역이라도 그 안에서 살아 있도록 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자가 '어디엔가 있을 법한 세계'라고 여기기를 바라니까요. 그렇게 그린 캐릭터, 살아 있는 캐릭터가 죽는 장면은 '죽는다는 건 이런 것이겠지'하고 생각하면서 그립니다. 역시 그건 더한층 아프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이토: 특히 '자기의 어디가 가장 좋으냐고 묻는다면 코운이라는 이름이라 대답하겠다...'하는 부분을.

 

 

 

이노우에: 음 뭐랄까, 예를 들면 스피드 표현? 말하자면 기호죠. 그것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라고 할까. 그게 가장 컸습니다. 기호와 기호 사이에 있는 것을 뚜렷하게 그려낼 것. 요컨데 그 뉘앙스의 표현의 '눈금' 같은 겁니다. 자에 그려진 눈금 같은 것이 있다고 치죠. 눈금 자체는 기호로 나타낼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사이의, 이 눈금과 이 눈금의 차이는 기호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표정이라거나, 완급이나 스피드 등 움직임의 사소한 차이죠.

 

 

 

이노우에: . 만화가에게 필요한 것은... 젊은 사람들이 물어보면 늘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대답하죠.

 그리고 특히 만화가에게 필요한 것은... 역시 체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철야작업이 이어지면 체력이 바로 그림에서 나타나니까요. 몸이 아프면 그림에 집중할 수 없으니까 디테일이 떨어집니다.

 

 

 

이토: 그런데 애니메이션이 된 순간 종이 위의 표현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는 거죠. 뭐랄까, '주저한 흔적'이 없어져 버려요. 그게 있고 없고의 차이가 굉장히 크더군요. 사실 펜선을 그린 시점에서 그 주저한 흔적은 모두 지워질 텐데 말이죠. 그래도 역시 거기엔 흔들림이 있어요. 선 하나에도 온갖 정보가 들어 있죠. 그런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이상하게도 흔들림이 사라지고 완벽해진다고요.

 

 

 

이노우에: 만화에서 말과 그림을 말하자면, 그림은 『생명』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죽을 힘을 다해 몰두하지 않으면 영혼 같은 것이 배어나오지 않지요. 그렇지만 만화에서 『말』은 비교적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뭐랄까, 굉장히 좋은 대사나 지문이 떠오르면 그 장면의 효과가 대폭 올라가곤 하기 때문에 뭔가 약은 수를 쓴 기분이 듭니다. 멋진 대사가 팟, 하고 떠오를 때는 그림을 그릴 때만큼 고생스럽지 않은 것 같거든요.

 

 

 

이노우에: 『배가본드』처럼 사람을 70명니아 죽이는 장면을 그릴 때 '무사시는 70명을 베었다'라고 설명만 하면 한 페이지로 끝나죠. 하지만 그 자리에 눌러앉아 계속 그리는 것은 자신에게 큰 부담이 됩니다. '이번 주에도 죽이고, 다음 주에도 죽이고' 이런 식으로 몇 주를 계속해요. 그러다보면 체력에 한계를 느끼죠.

10명 정도를 베거나 죽이는 장면을 그리면 더 이상 그리지 않아도 다들 죽였겠거니, 하겠죠. 하지만 그걸 그리지 않으면 뭔가 중요한 것이 전달되지 않는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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