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라, 로버트 M. 피어시그, 문학과지성사, 2014
"두 종류의 인간이 있소." 그가 말을 이었다. "한 종류의 인간은 여기 이곳에서 확인하는 온갖 잡동사니 때문에 이 나라를 마땅찮아 하고, 다른 종류의 인간은 여기 이곳에서 확인하는 온갖 잡동사니 때문에 이 나라를 사랑한다오."
인간의 머리는 일종의 찻잔과도 같은 것이다. 무언가를 담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세계에 대해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다면 배움을 위해 우리의 머리를 비워야만 한다. 새로운 차를 마시려는 시도를 실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차를 찻잔에 결코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이미 담겨 있는 차가 새로운 차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때문에, 찻잔에 이미 담겨 있는 것을 최고 품질의 차라 확신하기 때문에, 새로운 차를 마시려는 시도를 실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담겨 있는 것을 엄청나게 좋은 차라 생각하고는 찻잔 안의 차가 내는 찰랑거리는 소리를 과시하면서 일생을 낭비하기란 아주 쉽다.
그들 나름의 의식한 한 절차로 페요테를 사용하는 인디언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환각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환각에서 벗어난 상태"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가치에 대해 명쾌한 정의를 내리는 경우, '가치'의 모호한 성격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형이상학은 "현실의 본질과 구조를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로,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진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들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허상인가? 외부 세계는 이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는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을까? 현실은 궁극적으로 단 하나의 근원적 실체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현실은 정신적인 것인가 또는 물질적인 것인가? 우주란 인식 가능한 동시에 질서 정연한 것인가. 아니면 이해 불가능한 동시에 무질서한 것인가?"
한 치의 여유도 없이 광적으로 타락을 기피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종류의 타락이라는 논리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는 광신도들이 흔히 저지르는 타락이다. 일단 확인의 과정을 거친 순수는 더 이상 순수가 아니다. 오염에 대한 반대 자체가 또 한 형태의 오염이다.
신비주의적 세계 현실을 고착화된 형이상학적 의미로 오염시키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다. 자신의 출생에 대해 그 어떤 생각도 할 겨를이 없었던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을 빼고 나머지 우리 모두는 어떤 관점에서든 덜 순수한 존재가 되는 것에 만족해야만 한다. 술에 취하고 술집에서 여자를 만나 데려오는 일이나 형이상학적 글을 쓰는 일 모두가 우리 삶의 일부인 것이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소형 범선을 몰고 항해를 하다 보면 고립과 평화와 고요가 찾아올 것이고, 그러는 가운데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자유롭고 평온하게 사유를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품게 됐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결코 찾아오지 않았다. 배를 모는 일은 '배가' 요구하는 것을 빼면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겨를을 거의 갖지 못한 채 차례로 이어지는 이러저러한 위험에 노출되는 것, 바로 그것을 의미했다.
A. N. 화이트헤드가 "인류는 기존의 언어에 담기에는 너무도 모호한 사물에 대한 막연한 이해에 쫓겨 앞으로 나아간다"고 썼을 때, 그는 바로 동적인 질에 대해 쓰고 있었던 것이다.
선으로 인식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 자유로움이며, 악으로 인식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적인 질 그 자체 - 말하자면, 움직이고 있는 삶의 자유의지를 제어하고 죽이려 애쓰는 모든 종류의 편파적이고 고착화된 가치 패턴 그 자체-다.
인디언들의 용어 '마니토'는 때때로 "신"이라는 말과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말로 여겨지게 되었다.
"지금 바로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해 글을 쓰곤 한단 말인가요?"
"물론이오."
"왜들 이런 것들에 관해 글을 쓰려고 하는 거지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데 말이에요."
"항상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소." 그가 말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건 말이오, 당신은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자 할 때 동원하는 상투어에 들어맞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소."
하지만 적자생존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슨 이유로 어떤 생명이든 생명이 살아남는 것일까. 이는 논리적이지 않다. 생명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관찰한 적이 없다면, 그 무언가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결코 관찰한 적이 없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결코 그 무언가를 찾아보려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력의 법칙은 아마도 우주 안에서 가장 무자비하게 정적인 질서 패턴일 것이다. 따라서, 이에 상응하여, 날이면 날마다 이 중력의 법칙에 조소를 보내지 않는 생명체란 단 하나도 없다. 생명이란 중력의 법칙에 대한 조직적인 불복종이라 정의한다 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다.
명백히, 소설이 존재하도록 뒷받침하는 전압이라는 대응 패턴이 없다면, 어떠한 소설도 컴퓨터 안에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소설이 전압의 외적인 자기표현 수단이라거나 속성이라는 뜻은 아니다. 또한 소설이란 반드시 전자 회로 안에 존재해야 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물론 소설이 디스크나 드럼 또는 테이프의 자기磁氣 영역들 안에 머물러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소설이 자기 영역들로 구성된 것이라거나 자기 영역들의 소유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소설이 공책 안에 머물러 있을 수는 있지만 잉크와 종이로 구성된 것도 아니고 잉크와 종이의 소유물도 아니듯 말이다. 소설은 또한 프로그램 설계자의 두뇌 안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으나, 이 경우에도 역시 소설은 그의 두뇌 조직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고 그의 두뇌 조직의 소유물도 아니다. 동일한 프로그램은 무한하게 다양한 컴퓨터에서 실행될 수 있도록 설계될 수 있으며, 어떤 프로그램은 실행 과정에 스스로 다른 프로그램으로 바뀔 수도 있다. 또한 어떤 프로그램은 다른 컴퓨터를 가동하는 동시에 그 컴퓨터로 옮겨 가면서 원래 머물러 있던 컴퓨터의 가동을 중단시킴으로써 자신이 머물러 있던 흔적을 깡그리 삭제할 수도 있다. 이와 유사한 것이 생명체의 재생산 과정이다.
늘 그런 식으로 일이 풀린다. 정신이 지닌 지능은 살아야 할 이유를 생각해낼 수 없지만, 세포의 지능은 죽어야 할 이유를 생각해낼 수 없기 때문에 생명은 어떻든 간에 지속된다.
하지만 과학적 진리와 신학적 진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과학적 진리는 잠정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과학에는 항상 지우개가 내장되어 있다. 말하자면, 새로운 동적인 통찰이 과거의 정적인 패턴들을 지우되 과학 자체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명성이 주는 느낌 어디에나 무언가 미세하게나마 외설적인 것이 있다.
그는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말투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이른바 "샐러드처럼 말을 조각내어 뒤섞는 말투" 였다.
우주의 어느 한 고정된 지점에서 보면, 어차피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매일같이 하루에 한 번씩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주위를 동쪽이나 서쪽으로 도는 셈이 된다. 그리고 이스트 강 전체는 매일 아침 허드슨 강 위쪽으로 반 바퀴 돌고 매일 저녁 그 강 아래쪽으로 다시 반 바퀴 도는 셈이 된다. 우리가 "주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얼마나 쓸모 있는 것일까.
그가 "정상"임을 보증받고 나서 수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그는 자신의 병원 생활에 대한 "객관적인" 의학적 기록들을 찾아 읽을 수 있었는데, 그들이 얼마나 심하게 중상모략을 했는가를 확인하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들이 남긴 기록들은 전혀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종파가 상대 종파에 대해 남긴 기록들과 다름없었다. 정신병 치료는 진실에 대한 탐구 과정이 아니라 독단적인 교리의 전도 과정이었던 것이다. 종교 재판관들이 한때 악마에 굴복하는 것을 두려워했듯, 정신과 의사들은 광기에 물들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정신과 의사들이 광인인 경우 그들에게는 정신과 의사로서 활동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다루고 있는 대상에 대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알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었다.
파이드로스의 추정에 따르면, 이러한 비판에 대해 그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대응할 것이다. 폐렴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폐렴에 걸려야 할 필요가 없듯, 광기를 치료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광인이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같은 반박은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통째로 드러낸다. 폐렴은 생물적 패턴으로, 이는 과학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우리는 현미경을 통해 폐렴 구균을 연구함으로써 이에 대해 알 수 있다.
반면에 광기는 지적 패턴으로, 생물적 원인에 의해 발발할 수도 있으나 물리적 또는 생물적 현실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누가 광인이고 누가 정상인지를 보여주는 과학적 도구를 법정에 제출하기란 불가능하다. 우주의 과학 법칙들 가운데 '단 하나에라도' 들어맞는 측면이 광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과학 법칙들은 정상인들의 '창조물'이다. 이 정상인들이 창조한 어떤 도구를 동원하더라도, 그들 자신과 그들 자신의 창조물 '바깥쪽에' 존재하는 것을 측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광기는 관찰 행위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변형된' 관찰 행위일 따름이다. 지성의 패턴들 가운데 병든 것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이단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광기다.
이렇게 물어보라. "만일 이 세상에 오로지 한 사람만 존재한다면, 그가 광인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정상인이 광인으로 가장하고 정신병동에 들어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와 관련하여 실시된 실험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있다. 그 실험에 의하면, 의료진은 그의 연기를 결코 감지하지 못했지만, 그들 외의 환자들은 이를 알아차렸다 한다. 환자들은 그가 연기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자기네들에게 주어진 나름의 표준적인 사회적 역할 연기를 하고 있던 병원 의료진은 차이를 감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휴가를 뜻하는 영어의 베이케이션vacation은 얼마나 완벽한 이름인가. . . . '비움'을 뜻하는 베 이 케 이 션... 그것이 바로 디야나다.
그리고 그는 또한 프란츠 보아스가 원시 문화에서 사람들은 사실적 경험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말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덕이, 선이, 악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놓고 토론하지 않는다.
그들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아스는 이렇게 추상적인 말을 한 바 있다. "다코타 인디언은 선을 형용사로 보기보다는 명사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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