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한강, 난다, 2016(초판 3쇄)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얼어붙은 거리를 걷던 그녀가 한 건물의 이층을 올려다본다. 성근 레이스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다.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잠과 생시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순면의 침대보에 맨살이 닿을 때 그녀는 그렇게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물큰하게 방금 보도를 덮은 새벽 눈 위로 내 검은 구두 자국들이 찍히고 있었다.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언니, 라고 부르는 발음은 아기들의 아랫니를 닮았다. 내 아이의 연한 잇몸에서 돋아나던, 첫 잎 같은 두 개의 조그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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