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 기시 마사히코, 이마, 2016(초판1)


 


 


 


 


 


 유치원에 다닐 무렵 기묘한 버릇이 있었다. 길 위에 굴러다니는 무수한 돌멩이 가운데 아무것이나 적당히 주워 몇 십 분 동안 지그시 바라보는 버릇이었다. 이 드넓은 지구에서 '' 순간에 '' 장소에서 '' 나에게 주워 올려진 '' ....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과 무의미함에 난 전율할 만큼 한없이 감동했다.


 


 


 


 마치 물가로 떠내려온 말라비틀어진 나뭇조각처럼 5년이나 업데이트하지 않은 블로그에서는 어떤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우리 삶의 바탕에 있는 '관계의 취약성'을 느낀다. 좋다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든 다양한 '서사'를 내면에 담고 있다. 그 평범함, 보통다움, '아무것도 아님'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쥐어뜯기는 것 같다.


 


 


 


 또 한 사람의 헨리 다거가 지금 내가 사는 이 동네에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몇몇 데이터를 보면 고독사는 남성의 경우가 훨씬 많다. 고독사를 하고 나서 발견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남성이 훨씬 길다. 우리는 살아서도 고독하고 죽어서도 고독한 것이다.


 


 


 


 결국 무슨 목적으로 모둠냄비를 같이 먹느냐 하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그냥 얘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을 참으로 싫어한다. 우리는 상대의 눈을 보고 싶지도 않고, 남이 자기 눈을 보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 가든 있을 곳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다.


 


 


 


 나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심한 무정자증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내가 흐느껴 울면서 병원의 검사 결과를 갖고 왔다. 그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안전한 사내였잖아. 그럴 줄 알았으며 결혼하기 전에 더 실컷 놀 수 있었는데' 하고 딴 정신을 팔았다.


 아니 그게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건 난 안전한 사내였잖아. 그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더 실컷 놀 수 있었는데 하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겠는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웃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로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것이다.


 불현듯, 무의식적으로, 순간적으로, 난 그 사실을 이야깃거리로 삼음으로써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물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마음속에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꼭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자기 안에서 스스로를 향해 웃음으로써 어찌 해 볼 도리 없는 자기 자신과 어떻게든 대면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만 통하는, 부질없는, 한순간의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 한순간을 이어 붙임으로써 어떻게든 인생을 지속해 나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꽉 묶여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언가 아주 불합리하고 복잡한 사정에 의해,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장소에서 태어나, 다양한 '불충분함'을 떠안은 ''라는 것에 갇혀, 평생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이란 것은 종종 퍽이나 쓰라리다.


 무언가로 상처를 입었을 때, 무언가에 상처를 입혔을 때, 사람은 우선 입을 다문다. 꾹 참으면서 견딘다. 또는 반사적으로 화를 낸다. 소리를 지르거나 말대꾸를 하거나 노려보기도 한다. 때로는 손찌검을 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한편 웃을 수도 있다.


 


 


 


 스에이 씨의 모친은 젊었을 때 애인과 다이너마이트로 동반 자살했다. 모친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이다. 그는 이 체험을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우리는 비참한 상황에 내몰렸을 때, 오로지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인내하고, 어금니를 꽉 물고 참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피해자' 같은 것이 되어 간다.


 아니면 우리는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고, 이의를 제기하며, 모든 수단을 통해 호소함으로써 어떻게든 그 상황을 전복하고자 한다. 그때 우리는 '저항자'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몇몇 선택지로부터 달아날 수도 있다. 아무리 해도 달아날 수 없는 운명의 한가운데에서 스리슬쩍 새어 나오는 진중하지 못한 웃음은 인간의 자유를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러한 자유는 피해자의 고통 안에도, 저항하는 자의 용기 있는 싸움 안에도 존재한다.


 


 


 


 어떤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폭력으로 작용하고 마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그 생각을 말할 때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는 어법이 아니라 '그것은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좋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는 어법을 취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결혼식을 치르고 싶은 거니?" 이렇게 몇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쉬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어렴풋이 그날만큼은 어여쁜 드레스를 입고 모든 이들에게 ', 예쁘구나, 축하해' 하고 축복을 받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한다.


 우리는 보통 노력해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칭찬받거나 인정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단지 거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축하해, 정말 잘된 일이야, 참 예뻐' 하는 말은 좀처럼 들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날이 평생 동안 하루만이라도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터뷰와 숨을 멈추고 바다로 잠수하는 일은 참으로 닮아있다. 남의 생활사를 들을 때면 언제나 차갑고 어두운 밤바다 속으로 혼자 맨몸뚱이로 잠수해 들어가는 감각을 느낀다.


 


 


 


 전신을 주물러 주는 동안, 내가 느끼는 것은 내 신체의 경계선이다. 마사지라는 것은 외부의 세계와 나 사이에 있는 '국경'을 확정하고 재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구석구석 남의 손이 주무르는 동안, 나는 내 신체의 크기나 형태나 온도나 딱딱함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의 손으로는 느낄 수 없다. 그 작업에는 아무래도 타인의 손이 필요하다.


 


 


 


 도산으로 폐쇄한 주유소에 비가 내리고 있다. 사무소 안 창가에 놓여 있는 커다란 실유카 나무가 아무도 물을 주는 사람 없이 갈색으로 말라가고 있다.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에는 세찬 비가 내리고 있다. 그 건너편에서 실유카는 말라 비틀어져 죽어 있었다.


 


 


 


 우리는 고독하다. 뇌 속에서는, 우리는 특히 고독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뇌 속에까지 놀러와 주지는 않는다.


 


 


 


 육체노동을 하면서 이 일은 몸이라기보다는 감각, 또는 시간을 파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시간에 현장에 들어가 단수한 중노동을 견디고 있노라면, 그러는 사이에 5시가 되고 하루의 일이 끝난다. 그동안 8시간이라면 8시간 동안, 줄곧 나라는 의식은 덥다는 감각, 무겁다는 감각, 피곤하다는 감각을 계속 느끼게 된다....


 이러한 '신체적인 감각을 일정 시간 동안 계속 느끼는 것'이 일용 육체노동자의 본질이구나 하고, 몸소 노동을 해 보고 느꼈다. 뇌 속에서, 의식 속에서 주구장창 무겁다, 춥다, 아프다, 힘들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일이다. 그것을 누군가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 대신 돈을 받는다.


 


 


 


 이를테면 통증이란 아픈 원인을 들어내지 않는 이상 도중에 없어지거나 다른 것으로 변하거나 의지에 의해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플 때 매 순간 줄곧 아프다. 아픔을 견디고 있을 때, 나의 뇌는 아픔과 함께 있다. 아니, 아픔 속에 있고, 아픔 그 자체다. 나의 뇌가 아픔을 '느끼고 있다'는 표현은 어딘가 잘못되었다. 아플 때 우리는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픈' 것이다.


 그리고 아픔을 견디고 있을 때, 사람은 고독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도, 우리가 느끼는 격렬한 통증을 뇌에서 꺼내어 건네줄 수는 없다. 우리의 뇌 속으로 찾아와 느끼고 있는 아픔을 함께 느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각자가 고독하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각자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이야말로 우리라는 것을 조용하게 나눌 수 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란 것이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란 것도 있다는 단적인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 그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다수자란 무엇인가, 일반 시민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는, '커다란 구조 속에서 그 존재를 지시할 수 없다/지시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품고 들여다본다 한들, 자기 안에는 대단한 것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단지 거기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긁어모은 단편적인 허드레가 각각 연관성도 없고 필연성도 없이, 또는 의미조차 없이, 소리 없이 굴러다닐 뿐이다.


 


 


 


 우리는 아무런 특별한 가치가 없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과 지속적으로 씨름하며 살아가야 한다.


 


 


 


 시시한 자신과 어떻게든 맞붙어 타협해야 하지, 그것이 인생이야.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인생이다. 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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