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이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2016(초판 38쇄)






우리는 뇌 덕분에 인간 관계를 맺고 삶을 의미있게 만든다.

그러나 때때로 뇌는 망가져버린다. 




나는 언어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언어는 고작 몇 센티미터 두께의 두개골에 보호받는

우리의 뇌가 서로 교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반투명한 피부 사이로 뼈가 보이는 태아들은 아기라기보다는 아기의 밑그림처럼 보였다.




의과 대학원 4학년이 되자 많은 동기들이 방사선과나 피부과 같은 덜 고된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어리둥절해서

다른 유명 의과 대학원의 경우는 어떤지 알아봤더니 별로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근무 일정이 좀 더 여유롭고 연봉은 더 높고

스트레스는 덜한, ‘느긋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전공 분야로 눈을 돌렸다.




실제로 99퍼센트의 사람들이 연봉, 근무 환경, 근무 시간을 고려하여 직업을 선택한다. 그러나 원하는 생활방식에 중점을 두고 선택하는 건 직업이지, 소명이 아니다.




모든 의사가 질병을 치료하는 동안, 신경외과의는 정체성이라는 혹독한 용광로 속에서 일한다. 모든 뇌수술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본질인 뇌를 조작하며, 

뇌수술을 받는 환자와 대화할 때에는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 




당신의 아이가 얼마만큼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게 될까? 뇌는 우리가 겪는 세상의 경험을 중재하기 때문에, 

신경성 질환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때부터 나는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또 어떤 날은 끝이 보이지 않는 여름날의 정글에 갇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환자의 가족이 흘리는 눈물을 비처럼 맞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찮은 물질주의, 쩨쩨한 자만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 문제의 핵심, 진정으로 생사를 가르는 결정과 싸움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곳에서 어떤

초월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커다란 그릇에 담긴 비극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주는 것이 최고다. 한 번에 그릇을 통째로 달라고 요구하는 환자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는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환자는 의사에게 떠밀려 지옥을 경험하지만, 정작 그렇게 조치한 의사는 그 지옥을 거의 알지 못한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이 팽창한다면, 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시간은 수축될까? 분명 그렇다. 내가 보내는 하루는 엄청나게 짧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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