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채사장, 한빛비즈, 2016(초판 360쇄)





 사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유지해주는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유행이다. 전쟁과 유행은 자본주의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라 할 수 있다. 전쟁이 공급과잉의 문제를

단번에 해소하듯,유행은 필요를 뛰어넘는 막대한 소비를 창출해서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한다.




 그렇다면 연합국은 어떤 목적으로 전쟁에 대응했는가? 정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정의와 자유를 위한 도덕적인 전쟁이란 없다. 자국의 시장인 식민지를 지키고 독일, 일본과의 무역협정에서

계속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대응한 것이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를 얻으려는 국가와 식민지를 지키려는 국가 간의 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요청된다. 국가라는 개념은 신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특히 ‘애국’에 대한 강요는 지배자들을 편리하게 한다. 그래서 애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고 교육된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요청은 자본주의만의 특성은 아니다. ‘신’을 요청할 수 없는 모든 지배 권력은 애국을 장려한다.

 


 

 따라서 아무리 새로운 것과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의 신자유주의를 옹호한다면 보수에 속한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혁신적인 인물로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각인된 스티브 잡스는 아무리 변화와

혁신을 추구했다 할지라도 정치적 입장에서는 보수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저항한 게 아니라 현재의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를 최대한 이용하고 활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을 ‘진보’ 혹은 ‘좌파’라고 한다. 이들은 시장의 자유를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의 입장을 비판하고, 정부의 개입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런데 정부의 개입을 추구하는 입장은

매우 다양하다. 대표적으로는 후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있다.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도 여기에 포함되고, 아예 산업화나 국가 자체를 비판하는 환경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도 신자유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진보에 포함된다. 이와 같이 정부의 개입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진보는 전혀 다른 체제들을 동시에 지칭하게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후기 자본주의는 분명히 시장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체제다.

반면에 공산주의는 시장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체제다. 이렇게 이질적인 두 체제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함께 진보로 지칭된다.




 이렇게 후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동시에 진보로 분류된다는 언어적 문제는 한국 근현대의 비극을 만들어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의 후기 자본주의자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공산주의자나 빨갱이로 불리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문제는 순수하게 언어적 혼란 때문에 발생한 문제만으로 보기는 힘들다. 후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분이 의도적으로 은폐된 면이 없지 않다. 자신의 재산과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신자유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런 집단은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해서, 역사적인 맥락에서 한국인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를 후기 자본부의와 함게 묶음으로써 대중들이

후기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한국, 미국, 일본의 경우 대략 25퍼센트 내외의 세율을 유지한다. 수정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경우에는 대략 40퍼센트,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스웨덴, 덴마크의 경우 

50-60퍼센트 내외의 세율을 유지한다.




 중도를 주장하는 미주당은 현재 새누리당에 맞서 진보적 입장과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표에서 보듯 실제로는 어쨌거나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보수 정당이다. 따라서 세계의 보편적인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통해 판단하자면, 민주당은 엄밀히 말해 보수 정당의 위치에 서게 된다. 한국이 전 세계에서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국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 초기에 자유와 평등을 강조했던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은 보통선거권을 두려워해서 자본가는 4표, 노동자는 1표의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에 의해 사회가 필연적으로 공산화되리라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1인 1투표제가 시행되는 한국은 공산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오랜 시간을 보수 정당이 집권해오고 있다. 이런 한국의 상황을 본다면 밀은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그는 미디어의 영향력을 상상하지 못했다.

 대중은 생각보다 나약하고 무관심해서 자신의 이익과 권리가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기 귀찮아한다. 미디어는 그 틈으로 파고들어 대중이 봐야 할 곳을 친절하고 세련되게 가르쳐준다.




 소수의 달변가는 자신의 지지 기반을 토대로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어차피 명분이 있고, 설명만 잘하면 판단 능력이 결여된 대중은 자신을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첫 번째 문제점이 발생한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독재자’가 그것이다.




 전체주의는 독립적으로 자생하는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는, 사실 경제적 위기가 발생시키는 하나의 병리 현상으로 보인다. 아무리 평범하고 선한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기인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경제를 살리겠다는 인물이 있으면, 그가 전권을 맡는 것에 대해 침묵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한댜. 국가의 이름으로 독재를 하건, 외국과 전쟁을 벌이건,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를 잡아가건, 노동조함을 탄압하건, 대중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한 게 아니라 독재자가 한 것이고, 경제 회복을 위해서 전체가 함께 동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없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존재 가치를 절하하고 집단과

전체의 가치를 앞세운다.


 이것은 이지메의 원리와 동일하다. 전체가 비윤리적으로 행동할 때 내가 거기에 가담할 수 있는 것은, 그 비윤리적 행위의 직접적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있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화해보면 언어나 말에 대한 탐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의미론이고, 다른 하나가 화용론이다. 의미론은 내가 내뱉은 말 자체의 내용과 의미를 탐구한다. 반면 화용론은 내가 내뱉은 말이

왜 하필 그 시간, 그 공간, 그 주체외 대상 가운데서 말해졌는가를 파악하려 한다.




 의심 없는 대중은 사회와 미디어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고, 그들이 욕하는 대상을 같이 욕하고, 그들이 칭찬하는 대상을 같이 칭찬하며, 웃기면 웃고, 울리면 운다. 하지만 단적으로 말해서 당신의 삶이 현재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면, 재벌기업의 특정 제품이 세계 점유율 1위가 되고 스포츠 스타가 세계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은 당신에게 절대 중요한 일이 아니다. … 그것은 내 고등학생 자녀가 자기 반에 전교 1등이 있다고 

나에게 자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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