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하는 동물
인간은 유인원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호모 사피엔스.
개나 원숭이에도 여러 종류가 있듯 유인원도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결국 호모 사피엔스만 남고 다 사라졌다고 한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를 읽고 나면
인간의 평소 모습들을 자꾸 원숭이와 겹쳐서 바라보게 되는데
짜증내는 원숭이. 말다툼하는 원숭이. 이성에게 잘 보이려 몸단장하는 원숭이.
이성 앞에서 행동이 달라지는 원숭이. 먹이 먹는 원숭이. 먹이 함께 먹는 원숭이.
눈치 보는 원숭이. 보스에게 잘 보이려 아양떠는 원숭이. 기분 좋은 원숭이. 신음하는 원숭이.
이런 식이다.
사람의 웬만한 행동들은 다 동물의 행동과 쉽게 오버랩이 되는데
문득 다른 동물들도 사람처럼 ‘추억하고’과 ‘회상하는’ 시간이 많을까 궁금하다.
인간은 뇌가 크니까 아무래도 추억과 회상의 양도 더 많겠지 싶다가도
버려진 개는 자신의 평생에 걸쳐서 자신의 주인을 기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개는 주인이 외출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오직 주인이 언제올까만 생각하고 기다린다는데
그런 생각은 인간의 추억에 대한 회상과는 많이 다른 걸까.
아니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주인은 어느 순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변환하는 걸까.
우리가 어떤 좋은 시절을 회상할 때, 그것은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삶의 주인과 같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