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문학과지성사, 2018
선잠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삼월의 나무
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삼월에는 있다
겨울 무를 꺼내
그릇 하나에는
어슷하게 썰어 담고
다른 그릇에는
채를 썰어
고춧가루와 식초를 조금 뿌렸다
밥상에는
다른 반찬인 양
올릴 것이다
내가 이직 세상을
좋아하는 데에는
우리의 끝이 언제나
한 그루의 나무와 함께한다는 것에 있다
밀어도 열리고
당겨도 열리는 문이
늘 반갑다
저녁밥을 남겨
새벽으로 보낸다
멀리 자라고 있을
나의 나무에게도
살가운 마음을 보낸다
한결같이 연하고 수수한 나무에게
삼월도 따듯한 기운을 전해주었으면 한다
연년생
아랫집 아주머니가 병원으로 실려 갈 때마다 형 지훈이는 어머니, 어머니 하며 울고 동생 지호는 엄마, 엄마하고 운다 그런데 그날은 형 지훈이가 엄마, 엄마 울었고 지호는 옆에서 형아, 형아 하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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