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혐오, 파스칼 키냐르, 프란츠, 2019(초판 4쇄)

 

 

 

 스스로 모던한 체하는 작품들은 시대와 부합하건 혹은 시대가 그것을 거부하건 늘 구식이다.

 

 

 두 가지 방식의 말하기가 있다.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 “우리는 성 베드로의 눈물과 같은 것을 닦는다.” 나는 후자의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멀리 떨어진 농가 안뜰에서 들려오는 수탉의 울음소리에 현관 모퉁이에 서 있던 남자 

하나가 갑자기 오열하기 시작한다.

 

 

 또한 호라티우스는 침묵이 그 자체로 완전히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소리가 소멸한다고 해도, 분열의 극한에는, 즉 완전한 침묵에는 이루지 못한다. 호라티우스는 여름날 가장 무기력한 순간인 한낮에도 침묵은 적요한 강둑에서

“윙윙거린다”라고 말한다.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구슬치기를 하는 아이들과 닮았다. 아이들은 땅에 무릎을 꿇는다. 그들은 다른 구슬을 염탐하면서 하나의 구슬을 조준한다. 

 

 

 <리그베다> 제10찬가에서 정의하길,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청각을 제 영토로 여기는 존재다.

 

 

 인간 사회는 자신의 언어를 제 거처로 삼는다. 제 몸을 보호해 줄 바다나 동굴, 산꼭대기, 숲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목소리가 그들의 처소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 자매의 노래가 결코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았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노래를 듣고도 죽지 않은 유일한 인간인 그는 세이렌 자매의 노래를 이렇게 표현한다. “듣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는” 노래.

 

 

 인간의 눈은 흐르는 강물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다. 눈도 강물도 공평하게 훼손된다.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

 

 

 모든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외피를 뚫는 송곳의 성질을 지닌다. 신체, 방, 건물, 성,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뚫는다. 비물질적 성질을 가진 소리는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다.

 

 

 듣는 것은 보는 것과는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눈꺼풀로 차단할 수 있다. 

 

 

 소리에 조망이란 없다. 소리를 위한 테라스도, 창문이나 망루도, 요새도 전경도 없다.

 

 

 듣는다는 것은 멀리서 와 닿는 것이다.

 

 

 갓난아이의 청취는 출생의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소리를 낼 수 있게 되기 훨씬 전인 태아의 상태에서부터 아기는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에 복종하기 시작한다. 그 노래는 태아보다 앞서 존재해 온 의미 불명의 소프라노이자,

태아의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동시에 따듯하게 감싸 안는 소나타다.

 

 

 모순성과 경계 없음은 신의 속성이다. 소리의 본성은 비가시적인 성질을 갖는 것에 있다. 

 

 

 청각은 신의 편재성을 경험하는 유일한 감각이다. 신들이 말씀으로 귀결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는 간단히 말했다. ‘에코가 있는 모든 곳이 사원이다.’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 안에 있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다. 음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Konzentra-tionlager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다. 그 무엇보다도, 음악이 수용소의

조직화와 굶주림과 빈곤과 노역과 고통과 굴욕, 그리고 죽음에 일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수용소 군악대Lagerkapelle에 부여된 첫 임무이자 가장 일상적인 역할은 노역장에 들고 나는 수감자들의 행진에 리듬을 붙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앞에서 벌거벗은, 수치스럽고도 불완전한 두 골반이 요동한 결실이다. 

 

 

 프리모 레비는 처음 수용소에 입소할 때 연주되던 <로자문데>를 듣고는 밀려오는 조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무력한 인간들의 다리는 자의와 상관없이 시몬 락스가 지휘하는 리듬의 강요에 복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침저녁으로 이 불행의 안무를 보면서 미학적 즐거움을 느낀 독일인들에 대해 역설한다.

 독일군이 죽음의 수용소에 음악을 편성한 것은 수감자의 고통을 달래거나 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함이 아니었다. 

 1) 그것은 복종을 강화하고, 음악이 야기하는 몰개성적이고 비개별적인 융합 안에서 모두를 결속시키기 위함이다.

 2) 그것은 즐거움을 위한 것인데, 이 미학적 즐거움과 가학적 쾌락은 좋아하는 가곡을 듣거나, 한때 자신들에게 모욕을 주었던 사람들이 추는 굴욕적인 발레를 보았을 때 느끼는 것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음악이 지닌 가장 오래된 기능을 폭로했다. 그는 음악이 “저주” 같다고 적었다. 음악은 “생각을 없애고 고통을 완화하는, 끊임없는 리듬의 최면 상태”였다. 

 

 

 앙리 베르그송은 기계적 시계를 예로 든다. 하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우리는 전자식 시계 안에도 시계추라는 춤추는 유령이 내재해 있는 것처럼, 초침이 내는 소리를 둘씩 짝을 짓는다. 

 프랑스 문화권 사람들은 이 소리 그룹을 ‘틱-탁’이라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진지하고도 확실하게 ‘틱’과 ‘탁’ 사이의 시간 간격이, 한 쌍의 초침 소리를 마무리하는 듯한 ‘탁’과 뒤이어 새로운 소리 그룹이 시작하는 것 같은 ‘틱’ 사이의 간격

보다 짧다고 여긴다.

 

 

 1903년 발표한 논문에서 로버트 맥두갈은 인간의 귀에 두 개의 연속된 리듬 그룹으로 나누어 들리게 하는 매우 독특한 침묵을 “죽은 간격”이라 부를 것을 제안했다. 두 그룹을 나누는 침묵은 “끝남”에서 시작하여 “시작함”에서 끝을 맺는

모순적 시간이다. 

 인간이 귀 기울이는 이 침묵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세련되고 난해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동시에 잔혹해질 수도 있다는 것에 사람들이 놀란다는 사실이 나는 놀랍다. 예술은 야만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폭력의 반대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의지와 국가를, 평화와 전쟁을, 피 흘림과 사상을 대립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의지와 죽음, 폭력, 피, 사상은 어떤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때의 논리는 설사 그것이 이성을 거스른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의 논리로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옛 노래가 노인들에게 마법을 건다. 노인들은 때 지난 노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더는 인간이 아닌 후렴구에 불과하다. 

 

 

 소음noise은 인간 종이 지닌 체취와도 같다.

 

 

 끝이란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끝을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종식시키지 않는다. 다만 중단시킨다.

 

 

 우리는 전기 불빛의 웅웅거림을 세상 어디에서나 발견한다. 

 이것이 세계의 “음조”다. 

 

 

 텔레비전 방송들은 작가에게 흥미를 갖는데, 이는 고압선이 새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즉, 동시에, 우연히 죽이기 위해서다.

 

 

 인간은 강이나 꽃에게 어떤 흥미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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