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와 얼굴, 이슬아, 위고, 2023(초판 1쇄)

 

 

 고작 60년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소와 돼지와 닭을 이렇게까지 대규모로 먹어온 역사는.

 

 

 나의 꿈은 비인간 동물을 착취하지 않고도 무탈히 흘러가는 인간 동물의 생애이다.

 

 

 식탁 위 요리나 매대 위 제품에서 동물은 추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구체적인 고통 같은 건 매끈하게 닦여 나간 뒤다. 그러나 우리 역시 동물이라 그 고통을 헤아릴 줄 안다. 이 상상력은 아름다운 우유 크림 케이크에서도 가축화된 동물의 생을 그리게 한다.

 

 

 영화 속에서 한 어른이 다 안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원래 안 변해.“

 그러자 한 아이가 울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왜 안 변하는데? 안 변할 거면 왜 살아있는데?”

 

 

 김선우 시인은 시집 <나이트 사커>에서 고기라는 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고기라니, 너무 이상한 말이다.

 식재료가 되기 이전과 이후의 이름을 굳이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있던가. 양파는 팔리기 전에도 양파라 불리고 땅속에서도 감자는 감자이며 바닷속에서도 미역은 미역이다. 그러나 돼지나 소나 닭은 식재료가 되고 나면 이름 뒤에 고기라는 말이 붙는다….

 “고기를 먹는다”는 문장 속에는 오로지 먹기 위해 동물을 탄생시키고 고통 속에 살게 하다 죽인 뒤 가공하는 과정 모두가 은폐되어 있다. 고기라는 단어 자체가 도축의 현장으로부터 인간의 눈을 가리고 동물의 피 냄새로부터 인간의 코를 막기 위해 존재하는 말이라는 것. 고기에는 동물이 부재한다.

 

 

 “인간은 죽을힘을 다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인 힘으로 산다.” <절멸>에 적힌 문장이다.

 

 

 세상 대부분의 일이 ‘어차피’와 ‘최소한’의 싸움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과 그래도 최소한 이것만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미래인지 감수성이란 무엇일까.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결혼이주여성의 42.1퍼센트가 가정폭력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 수치는 이주민이 아닌 여성의 가정폭력 경험보다 세 배나 많다.

 

 

 밤은 소음이 줄어드는 시간이다. 눈을 감듯 귀를 감을 수는 없어서 듣기 싫어도 들어야만 했던 소리들이 잠잠해진다. 그런 시간에 성은 씨는 책을 읽는다. 정확히는 책을 듣거나 만진다. 책들은 대체로 예의 바르게 말하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한다.

 

 

 글쓰기가 독자에게 장면을 바치는 일이라는 사실은 나에게 점점 더 절절해진다.

 

 

 언어 특성상 점자책은 같은 내용도 묵자책보다 두꺼운 분량이 된다. 소장도 보관도 쉽지 않다. 성은 씨가 도서관을 애용하며 살아온 건 그래서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화되는 책은 일부다. 신청해도 몇 달이나 걸린다. 그런 점에서 전재책과 웹소설 시장의 발전은 고무적이지만 훌륭한 콘텐츠와 기기가 출시되어도 여전히 제약이 많다. 앱 내 결제 과정 또한 시각장애인 혼자 해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모든 작물이 다 타버린 해에도 왜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용기를 잃지 않는다는 게 무엇인지도. 인터뷰에서 그는 ‘새 마음’이라는 표현을 썼다. 뭐든지 새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자꾸자꾸 새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도한 만큼 아름다우려면 책을 인쇄하기 전 인쇄소에서 감리를 봐야 한다. 감리를 보는 날엔 인쇄기를 다루는 기장님과의 만남을 생각했다. 인쇄소 기장님 중 귀에 솜털이 없는 분들이 더러 계신다. 마을버스보다 커다랗고 기차보다 시끄러운 인쇄기의 소음으로부터 청력을 보호하고자 수시로 귀마개를 끼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귀마개를 끼워 넣으면 귓구멍이 넓어지고 솜털도 사라진다고 한다. 누군가가 그런 소음 속에서 약속을 지키며 일한 결과, 내가 쓴 글은 겨우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온다.

 

 

 프랑스의 가족관계 문서는 ‘부/모’ 말고 ‘보호자1, 보호자2’를 적게끔 한다. 부모가 모두의 기본값은 아니라는 점을 존중하는 문서 형식이다.

 

 

 <천장의 무늬>는 이다울 작가가 자신의 아픔이 납작해지는 것을 구해내기 위해 시도하는 책이다. 

 

 

 쓰레기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직 쓰레기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물질을 깨끗하게 감싸던 것. 손과 물건 사이의 얇고 가벼운 한 겹.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한 결과로 깨끗해지고 싶지 않다면 어떤 제품을 골라야 하는가? 크루얼티프리(cruelty-Free) 기업을 찾아야 했다.

 

 

 나의 오랜 친구 담은 가끔씩 자신의 집을 ‘엄살원’으로 운영한다. 엄살원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거기 가서 엄살을 피우고 싶어진다. 딴 데 가서는 못 할 얘기도 편히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담은 엄살원을 ‘밥만 먹여 돌려보내는 엉터리 의원’이라고 설명한다.

 

 

 나의 동료 작가 안담은 “필연적으로 비거니즘은 실패와 용서의 장르”라고 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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