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공간, ISSUE 683, Between Destiny and Skepticism: Chung Isak + a.co.lab architects
‘굳이’에는 장음이 없다. 하지만 굳이를 발음할 때는 ‘구-지이’라고 길게 발음해야 제맛이다. ‘구’를 길게 끌수록 애써 일을 만들어 고생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길 수 있다. 4년만에 에이코랩건축사사무소(이하 에이코랩)의 프레임을 진행하면서 나도 모르게 굳이를 연발했다. 최소한의 건축적 개입, ‘건축가 없는 건축’을 표방한다는 이들의 언명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외양과 달리 에이코랩의 건축은 ‘대단한 건축적 의지’의 산물이다.
그는 최초 계획과는 달리, 주민과 운영 대행사와 서울시와 중구의 각기 다른 욕망 가운데 누더기가 된 계획안에 만족하는 우리를 보며 의문이 섞인 감상을 남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당시 그의 피드백을 위로로 여겼다. 우리는 공공 미술이나 파빌리온 사업 등에 초청될 때, 대부분의 건축가팀들과 꽤나 다른 의지로 작업한다. 이 사회가 건축가에게 기대하는 공공 미술 또는 설치 작업은 대개 큰 규모의 형태적인 퍼포먼스가 강조되는 것들이고,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그것에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건축 밖에서 일반 작가로 순수 미술 전시에 초대되는 경우가 있다. ‘하나의 일로 접근한다’는 김장언의 비판은 작가병을 피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생각하면 반갑고, 작업 의지를 생각하면 섣부른 판단이다. 우리는 좋은 생각을 펼쳐 보이는 데 있어, 많은 생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갈아엎고 짓는 것에 열중하는 건축업의 속성을 감안하면 모순된 말이지만, 이러한 기준은 우리의 모든 작업에 적용된다. ‘회현천년 이웃나무’는 관계자를 향한 연민과 함께 여전히 나의 마음속에 뜻깊은 작업으로 남아 있다. 서울 한가운데 영구 설치되는 조형물을 만들 기회는 누구에게든 의미가 크겠지만, 우리는 사업 시작부터 그곳에 새로운 것이 적을수록 좋다고 믿었다. 제안서를 글로만 제출했고, 작가 선정 이후에 그 말의 형상을 찾는 노력과 능력이 부족했다. 무엇이든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히려 사업이 진행될수록 다양한 관계 주체들의 이기심 가운데서 우리는 그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 그 난장의 상황이 진정 멋진 퍼포먼스적 결과였다. 기념석을 만드는 것은 사업 운영 대행사의 필수 이행 과제였다. 무엇인가 적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기념석의 소외된 상부 면에 작업 제안 시의 글 일부를 남겼다.
그 감각은 짚으로 새끼를 꼬는 손의 기술 같은 것이고, 그 태도는 평상에 고추를 말리며 기다리는 모습 같은 것이다. 우리가 자주 의식하지 못하고 중요하다고 믿지 않는 나머지의 기술과 모습들, 난 그런 사소한 것들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공동의 무의식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 정이삭이 ‘회현천년 이웃나무’ 기념석에 남긴 글
함께 사무소를 운영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MMCA 과천프로젝트 2021: 예술버스쉼터’공모전에 지명됐다. 이 작업의 콘셉트와 우리의 건축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 셔틀버스 정류장이 현실계에서 미술계로 전이 시켜주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재료에 관성적이지 않은 기술과 정성을 들여 만들어진 것이 일상에서 예술로 전이되는 시설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건축 태도와도 연관되는 “값싸고 흔한 재료에 정성을 들여 기존과 차이를 가지는 보편적 가치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방은 주거에서 주로 쓰이는 독특한 단어다. 하지만 주거가 아니더라도 유아방, 이야기방, 놀이방, 심지어 카톡방에 이르기까지 방이라는 말에는 밀접하고 개인적인 내향의 뉘앙스가 있다.
정북일조사선 법규로 인해 계단실과 엘리베이터가 필연적으로 남향에 배치될 수밖에 없어 정작 내 집의 실내에서는 남향의 빛을 받을 수 없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미술 전문지 <아트포럼>과의 인터뷰에서 매튜 슬로토버(프리즈 공동창립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비엔날레에서는 “사물들 간의 모종의 관계”가 존재하는 반면, 아트 페어에서는 “함께 보여질 의도가 전혀 없었던 2,000~3,000개의 사물들”이 한데 모인다는 것이다. 요컨대 아트 페어에서는 큐레이션이 없다는 뜻이다. 아트 페어에서 큐레이션을 수행하는 이는 방문자다. 내가 소유하고 싶은 물건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행위 자체가 사적 큐레이팅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건축가 김수근이 일본에서 출판한 글에서 한옥은 외적 공간, 내적 공간 그리고 ‘대청적 공간’을 명확하게 나누고 있다고 쓴 것을 본 적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외적 공간이 정자와 거실 같은 나무의 공간, 내적 공간은 사방이 한지로 마감된 안방 같은 종이의 공간이라면 대청적 공간은 내부와 외부 사이에서 여기 붙기도 하고 저기 붙기도 하는 양면적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현 시대의 카페는 타인과 일정 거리를 두고 싶으면서도 함께 있는 감각을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담고 있다.
제로링궐이 0개 국어라는 뜻이잖아요. 오히려 그런 경계인으로서의 특징이 다른 나라의 문화나 건축, 예술이 가진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 줄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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