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을 저승처럼 거닐고 있다'고 어느 까페에서 어느 형님이 쓴 글을 보았다.

저승을 가보지도 못했고 있는 지도 모르면서 차암- 잘도 갖다 써붙인다고 생각했다.

한 편, 그럴 듯 한 것 같기도 하다.

 

모호함을 모호한 채로 두고 더 모호하게 흐트리는 방식으로 무언 가를 해 나갈 때

그러니까 모호함에 부글거리는 기름을 섞어 모호하게 잠과 깸을 반복하면서

감자인지 호박인지 모를 아무튼 으깨진 것을 바라보듯이 밤이나 밥이나 거리를 보았을 때

그런 상태의 것인 나를 좋아하던 누나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전교 10등 정도를 했는데 자기 남동생은 전교 1등일 뿐더러 과학고에 진학을

하고 모의고사를 보면 전국에서 수 십 등 안에 드는 그런 녀석이었기 때문에, 나 안해,

하고서 수능 시험도 보지 않고서 고교 졸업 후 3년이나 놀다가 어머니께서 손수 수능 등록을

하시고 울면서 한 번 만 보라고 해서 시험 봐서 한림대 철학과에 들어온 그런 누나다.

 

신춘문예 등단 후, 제일기획에 카피라이터로 스카웃 된 뒤에 과로로 인해 지하철에서

몇 번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기를 반복 하다가 장기 무급 휴가를 내고 결국 그만 둔 뒤

돈이 떨어져서 다시 모 회사에서 카피라이터 겸 대리로 일하고 있는 그런 그 누나는

 

내가 대학 1학년 때, 모든 것이 모호해서,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정직한 것을 쓸 수 없었을 때, 그런 나의 모습과 내가 쓴 것들을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도로에 화물트럭에 수 십 번 짖밟혀 납작해진 짐승 쥐포가 개였는지, 고양이였는지,

오소리였는지, 너구리였는지, 새였는지, 갓난 아기였는지 알 수 가 없었던 당시의

내 호흡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내게 대단한 힘이 되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누나의 미모는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고, 더불어 탱크보다도

단단한 그 정신 세계에 접근 할 수록 묘한 전기장 사이에서 산책을 하는 것처럼

호흡이 불편한 감전상태를 맞봐야 했고, 또 그 누나의 비교적 친구로 보이는 누나들도

대개 그런 부류였기 때문에, 사실 무섭거나 겁을 내는 때도 많았다.

 

<바람의 그림자>에서 주인공인 녀석은 어느 날,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멍청한

이유로 한 밤 중에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깬다. 재밌는 것은 예를 들어 10년이나 15년

정도를 함께 살고 어머니가 돌아가실 경우, 이 15세의 남자아이는 제법 오랫동안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 같다. 반면, 너무오래 함께 살아서 어머니가 할머니로 변해 가는 것까지

모두 목격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어머니의 어떤 얼굴을 기억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호해지고

상상속의 어머니와 실제 어머니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참아내야 한다.

 

아무튼, 이 주인공 녀석처럼 어느날 단 하룻사이에 나는 선명함을 잃어버렸는데

정말이지 하루 사이에, 공기의 선명함도, 즐거움이나 슬픔의 선명함도, 시선의 선명함도,

물건이나 감정의 선명함도, 동네의 선명함도, 명함이나 활자나 사진들의 선명함도

한 순간 사라져 버리고 뿌옇게 보여서 기겁을 했다.

 

그게 벌써 17년이나 16년 정도가 지난 것 같은데, 돌아오겠지, 다시금 돌아오겠지,

기다렸어도 조금도 그 선명함을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이를테면 장농만한 스테레오

스피커로 듣던 마당 화분가의 고양이 그르렁 대던 소리가, 어느 순간 아이리버 MP3

정도의 전자 분해음과 전자 잡음이 쿄쿄쿄 들리는 가운데, 고양이 삭신 쑤시는 소리처럼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것이 자동차 배기음 소리인지, 오후의 소리인지, 오전의

소리인지, 새벽의 소리인지 알 수가 없고, 그것이 과연 고양이라고 할 만한 것이지도

알 수가 없는 그렇게 모호하고 지저분한 소리로 변해버린 것과 같다.

 

그 상태로 꿈 꾸듯이 17년 전의 그 선명했던 소리와 그림들, 감정들을 떠올리면서

정말 배가 터질 것처럼 아프도록 웃어대던 때의 수 천 마리 고양이들의 발정과도 같던

그런 감각에 비닐 랩을 씌워서 김치 냉장고에 넣어 둔 것처럼, 그렇게 모호한 감정 속에서

살아가자니, 과연 '이승을 저승처럼 살아간다'는 느낌에 수긍이 갔다.

 

그럼요. 그럼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내가 무엇을 해 줄수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양보 할 수 있느냐,

라고 또 <바람의 그림자>의 노숙자는 얘기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아무래도 TB에게

'외롭지 않음'과 '살맛 남'과 '들뜸'과 '애정의 충족을 느낌'을 양보해야 할 것 같다.

 

소위, 갖가지 스캔들과 드라마틱한 상황, 본의 아닌 상처를 가함,그리고 난처함에 직면하는

여자의 경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무심함이다. 나는 17년 동안 모호한 세계에 살아

오면서 모호한 것을 모호하지 않은 듯 바라보고 얘기하는 재주를 성취하게 되었는데

스무 살 적, 노트에 적어놓은 시들과 요즘의 시들을 비교해서 바라보면,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거의 이런 식이었다.

 

<하늘에 뿌연 뱀장어 뒤틀리는 어두움, 회색이라는 이름의 나방이 이빨을 갈거나 혹은 문지를 때, 그대 떠나온 곳, 둥둥거리는 소리 혹은 형태의 액체가 주사되는 여름의 모기장, 모기장 틈의 눈동자.......>

 

이런 느낌을 요즘은 이렇게 쓴다.

 

<하늘에 팝콘 구름이 노랗게 눅눅해집니다 회색빛 나방이 이빨을 뱉는 소리/그대 떠나온 곳은 별자리 황소, 혹은 AB형의 모호한 바다/여름의 모기장은 씹어먹을 듯이 아릅답습니다만, 그대/어느 곳 모기별들에 붙들려 나들이 중이신가요.>

 

내가 선명하게 볼 수없는데,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전달하고는 싶은, 요상하고 타협적인 마인드,

는 엄연히 내가 키운 재주라고 볼 수 있다. 덕분에 예전, 내 모호함을 사랑하던 누나는 이제

너의 시에는 매력이 없어, 평범해졌어라고 말을 하고, 당시에 나를 알던 사람들도, 노멀해졌네, 당신, 이런 말들을 툭툭, 핀을 뽑은 수류탄처럼 집어던지고는 한다.

 

이것 참, 그 눈동자 속에 석회가루를 주사하거나 혹은 으깬 맥반석가루를 문지르는 듯한 모호하고 답답함 속에서 지랄하던 것이 그 사람들에게는 재미있었거나 놀랍거나 신기했거나 아무튼

활력소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게 중에는 어떤 도움을 주었거나 주려던 사람도 있고, 내가 도움

청하기를 기다렸던 사람도 있고, 별 생각 없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정작 나로서도 당시에는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이 나를 아끼고 사랑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제 어른이다, 라고 말할 나이는 되었으나 어른이 되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는 오늘,

저승을 걷듯이 다시 서울 거리를 걸었다. 예쁜 아가씨들이 많고 그들에게는 약속도 많고

친구들도 많고 세상에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불순물을 보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는

특제 마인드 주사도 한 가득이다. 모호하지 않은 걸음걸이가 다만 높은 굽과의 싸움으로

뒤뚱거리는 모습이 백치미를 뿜어내기도 한다.

 

아, 그래. 내가 만약 오늘 하루를 저승처럼 걸었다고 느낀다면, 내가 짐작하는 저승은

대단히 뿌연 안개가 가득한, 고담시 같은, 다만 유머나 영웅은 없는, 그런 곳인 것 같다.

무려 일곱 달 만에 헌혈을 했는데, 그 이유는 영화 예매권을 준다는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헌혈했던 작년 12월까지, 스물 여섯 번의 헌혈을 하면서 내세웠던 이유는,

 

내 몸에 피기름이 많아서 세상이 뿌연가보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는 매끈매끈 거리는 것이

틀림없이 기름 성분이 있을 것 같다. 그날, 누군가 신의 가위를 들고서 시신경의 수 많은

매듭 중에 선명함을 잇는 시신경을 싹둑 끊어버린 날, 그날을 오늘도 기억한다는 것이,

친척 집에 두고온 빈대떡 만큼의 아쉬움을 준다. 오늘도 용기라는 이름의 지팡이에 기대서

삶을 전전한다는 기분이 든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뿐더러, 내가 사랑하기는

피곤하고 무섭다.

 

때로, 사랑이란 방학숙제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막상 하게 되지는 않는데, 어느 순간엔가

제출해야만 하는, 그래서 '했었던' 듯이 해치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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