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와 관련된 소설을 읽는 중이다. 어느 꼬마 녀석이 자신은 전생에 '에곤 쉴레'였을 거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새엄마를 꼬신다. 결국 이 꼬마 녀석 때문에 새엄마와 자신의 아버지가
헤어지고 별거를 하게 되는데, 그 후에도 집요하게 새엄마를 찾아가서 꼬신다. 아직 얼마 읽지
않았는데 현재까지는 그런 내용이다.
그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가 생각 나고, 한 때 좋아했던 지금도 좋아하는 렘브란트도 생각이 나고,
소설 드문드문 삽화처럼 불쑥 튀어나오는 에곤 쉴레 그림에서 병이 옮아오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책에서는 누가 에곤 쉴레 그림을 보며 이런 말을 한다. "아, 그 모델에게 억지스럽고 힘든 자세를 요구하는 그림말이지?"(아, 정확한 인용이 어렵고 대충 이런 식으로 말했다.)
나는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것 중에 하나가 누드모델을 해보는 것이다. 얼마나 해보고 싶었느냐면 가끔씩 누드모델 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가끔씩 누드 모델을 하는 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읽었던 것, 누드 모델을 하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를 보았던 것이 꿈의 도색에 도움이 되었다.
가끔씩 꿈속에서 페인트 냄새를 맡기도 하는데, 그때면 누군가 다녀간 방에 들어선 기분을 받는다. 그러니까 꿈속에서 누드모델을 하고 있다면, 이미 누드모델을 하고 싶던 누군가가 다녀간 꿈속을 다시 방문하는 기분이다. 그럴 때 꿈속은 내가 만든 나만의 공간이 아니라, 우주 저편 어딘가에 잠든 영혼이 모이는 공간을 지칭하는 것도 같다.
실제로 꿈의 비밀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가설 중에는, 잠든 영혼이 얇은 끈을 달고 빛 보다도
빠른 속력으로 우주 반대편의 모 지점에 모여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지구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내용도 있다. 사실 꿈속이라야 편안하게 누드 모델을 꿈꾸는 법, 말짱한 정신으로는 황망해서 잘 못할 것 같다.
그래도 해보고 싶다. 고전주의나 옛 그림들을 보면 모델들의 몸매가 오늘날 권상우나 비 몸매와는 많이 달라서 용기를 준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다비드상을 보면서 내 몸을 비교해 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눈앞에 다가오는 골리앗을 떠올리며 조바심을 내거나, 손을 쭉 뻗어 다가오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잡아 분질러버리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혹은 골무를 씌워준다거나.(나를 봉제해줘서 고마워요, 당신도 노동자였군요.)
누드 사진집을 내는 젊은 연예인들의 상당수는 가장 아름다울 때의 자신의 모습을 담아두고 싶어서,라는 이유를 댄다. 연예인이 한 말만 아니라면 제법 수긍이 가는 말이다. 자신의 홈피에 도배가 되어 있는 셀카나, 기념일 사진들을 보면, 그리고 의외로 많은 커플이 한 번쯤 찍어본 적이 있다는 셀프섹스비디오(주간조선 잡지에서 읽었음)를 생각해보면, 누드 그림 모델을 해보고 싶다는 내 야심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사진 보다는 그림 모델이 훨씬 기대가 되는데, 그것은 그만큼 예상되는 정도가 적기 때문이다. 혹시 가능할까 해서 <그녀>님에게 부탁해보려고 했는데 이분은 아무래도 인물화는 안하시는 모양이다. <나방>한테 부탁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기는 한데, 울그락 불그락 창피함을 참으며 모델을 섰더니 파란 물고기를 보여주면서 "이게 너야'할까봐 두렵다.
인물화 중에는 렘브란트 같은 느낌의 인물화가 좋다. 환타지한 느낌을 좋아하면서도 내 얼굴을
그린다면 이렇게... 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누군가와 얘기하기를 진지하게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즐겁게, 웃으면서, 유머러스하게, 가볍게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진지하게 한참을 얘기하고 난 뒤의 기분은 항상, 밤새 술마신 뒤에 해 뜰녘에 거리로 나와 걸으며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기분이다. 속도 쓰리고.
반면, 사진이나 그림을 통해 누군가와 커뮤니케이션 한다면, 즉, 내가 너를 그리고 너가 나를 그린다면, 그건 가급적 솔직하게 전달하는 게 좋다. 표현에 있어서도, 기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런 그림을 좋아한다. 때때로 그림은 말보다 따듯한 것 같다. 그래서 누가 내 누드를 그려주는 상상을 할 경우, 누가 몇 시간을 말로 위로해주는 것보다 훨씬, 심장이 따듯해지고 어깨도 차분해진다.
이를테면, 죽은 예수에게, 죽은 예수의 엄마에게, 죽은 예수의 친구들에게, 그것을 목격한 숨죽인 사람들에게 말로 위로를 전하는 것은 도통 실감이 나질 않는다. 썩은 생선에 향수를 뿌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피에타상>을 보면, 썩은 생선을 잘 씻어서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성한 부분에 약물을 발라서 시원하고 편안하게 보관해줄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향수를 몇 번 뿌려대는 행위보다 훨씬 성의가 있다.
내가 누드모델을 하게 된다면, 나를 그리는 사람은 분명 성의가 있을 것이다. 성의 없이 남 옷벗겨 놓고 몇 시간을 어깨 두드리며 붓질 혹은 연필질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게 좋다. 싹싹-하는 붓, 혹은 연필이 자라나는 소리를 들으면, 일종의 치유되는 기분을 받을 것 같다. 그러나 혹시 누군가, 아니 당신 창피하지도 않소, 왜 누드 모델을 했죠? 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야지.
"젊었을 때 모습을 남겨두고 싶었어요. 마침 시기도 적당했고..."
이런 걸 바로, 상대방을 위한 언어라고 하는 건가. 그렇다면 누드집을 내는 연예인들도 상대방(대중)을 위한 멘트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정녕 솔직히 대답할 경우, 별로 듣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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