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첼에 2002년 11월에 쓴 글이다.

왜 자꾸 옛날 것들을 캐내서 여기 올리느냐, 하면,

요새 너무 바쁘고 정신 사나와서 또 눈치 보느라 도무지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오! 이해하시오오!

 

 

예전 걸 보면, 느끼는 점 몇 가지.

 

1. 에너지가 많았다.(성욕 해소하듯이 글을 써나갔다)

2. 투박하고 서툴렀다.(지금도 그렇지만)

3. 착했다?

 

 

나이가 들면서 살짝 느끼는 것은, 요즘은 '기본적인 건 다들 알겠지'라는 베이스를 가지고 생각하거나 뭘 끄적이는데, 예전에는 '잘 모르지 않을까' 라는 베이스로 별 것도 아닌 기본지식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들이댔다는 점?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어느 때부터인가 영화를 보는 목적이 나의 수준을 검증 받기 위한 것이 되어 버렸다. 나는 남들이 재밌다고 하는 영화, 즉 기획사에서 일정의 타겟을 선정하고 그들을 만족시켜 돈을 벌려는 목적의 기획영화들에서 가치를 찾아내지 못하는 수준을 지닌 사람이 되었다. 이런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영화 이야기를 할 때는 되도록 끼어들지 않는다. 내가 그 이야기에 끼어 들기 무서워하는 이유는 당연히 이런 나의 좁은 시선을 들킬까봐 겁나기 때문이다. 내가 실제로 영화의 전문가이고 평론가라면 조금은 편하게 이런 나의 견해들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관객의 입장에서 감독을 평가하고 관객을 평가하는 것은 하면 할수록 남는 것 없는 짓이다.  영화라는 장르는 분명 상업주의의 목적을 지니고 탄생하였다.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처음 시사회를 가진 영화는 <기차의 도착>으로서 돈을 받고 상영하였다. 차라리 영화가 그저 이 수준에 머물렀더라면 나의 고민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영화는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서려는 시도를 했고, 일부의 영화는 성공 한 듯이 보인다.

  영화의 관객은 대략적으로 세 단계의 변화를 거친다고 한다. 처음에는 흥미 위주의 영화들, 인기 있는 영화들을 보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특정한 장르를 선호하게 된다. 이 시기에 내가 특히 좋아하게 된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였는데 개인적으로 내 정신상태가 가장 현실로  부터 벗어나고 싶던 고등학교 시기였다. 로맨틱 코미디는 한 마디로 환상이거나 만화책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컬트영화에 빠져든다. 컬트의 본래 뜻은 "다수의 관객이 몹시 좋아하며 열광하는 영화"로서 고유의 미국 문화적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독특한 스타일과 시선이 묻어나며 실험정신이 담겨있는 영화"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내가 말하는 컬트는 후자의 경우로서, 독특한 컬러의 영화를 선호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세 번째 단계의 관객들은 무리를 지어 영화를 보러 다니지 않으며,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남들과 다른 부위를 뜯어먹는 특성을 지닌다. 즉, 텍스트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 번째 단계의 사람들이 이런 쓸데없는 짓을 시간과 돈을 들여서 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개인적 우화'로서 누구도 나를 이해 할 수 없다는 자기만족의 성향이다. 복선이 많고 작가주의 적인 영화들을 골라 봄으로서, 이런 영화를 이해 못하는 대다수의 인물 군들을 비웃고 싶은 욕구를 스스로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보다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대부분의 기획영화나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시작 즈음에 이미 결말이 짐작 간다는 것이다. 최근에 본 영화로 <비밀>이라는 일본영화가 있었다. 기존에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 <포스트맨 부르스>, <하나 비>, <철도원>, <소나티네> 등을 통해 만족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기대를 가지고 보게 되었는데 상당히 무료하게 영화를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딸의 몸 속에 들어간 아내가 아무도 모르게 아내와 딸의 두 가지 역할을 연기하는 것을 통해 마지막에 주어지게 되는 반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너무나 노골적으로 이것을 미리 노출시킨다. 뜸이 들기도 전에 김을 빼버리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술을 마신 남편이 아내에게 "원한다면 아버지가 되어 줄께"라고 말하고, 바로 그 다음날에 느닷없이 딸의 영혼이 등장한다. 이 시점에서 이 영화는 가치를 잃어버렸다. 영화를 보다보면 대부분의 영화가 일종의 틀을 따라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틀에 치중하게 되면, 시나리오는 대본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짐 캐리의 영화 중에서 <마제스틱>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 역시 헐리우드 적인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주인공인 시나리오 작가를 통해서 시나리오가 이 틀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꼬집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영화는 시나리오 작가만의 것도, 영화 감독만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프로덕션의 기획과 마케팅이 많은 역할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헐리우드 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면을 꼬집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장 관객이 흥미를 돋굴만한 소재에, 흥미를 돋굴만한 방식의 이야기, 흥미를 돋굴만한 연출, 그리고 감동을 느낄만한 부분의 뚜렷한 강세(과장 된 음악과 클로즈 업, 과장 된 연기 등)가 바로 그것인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또한 헐리우드의 영화작업은 정확하게 프리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프로덕션으로 나뉘어 있다. 감독은 오직 프로덕션만을 수행할 수 있고, 기획은 기획사에서, 편집은 편집실에서 독자적으로 작업하게 된다. 따라서 헐리우드에는 진정한 작가주의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정작 우스운 것은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같은 면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오히려 이로부터 벗어나는 영화를 못 견딘다는 것이다. B급 영화가 가장 대표적인데, 예를 들어서 공포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인물의 등장과 함께 가장 마지막에 살아남을 여자를 누구나 짐작해 보게 된다. 공포의 주체는 어떤 인물도 쉽게 죽여버리지만 마지막에 가장 힘 없고 예쁘게 생긴 여자에게 어이없이 죽임을 당한다. 관객들은 이런 패턴을 뻔히 알면서 그 패턴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으며, 이 뻔한 플롯에서 벗어나는 영화를 만나게 되면 당당하게 "뭐 이따위 영화가 다 있어!"라고 성질을 낸다. 한 마디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짜고 치는 고스톱을 이미 수 십년 전에 아도르노는 <문화산업론>에서 비판 한 적이 있다. "관객은 스스로 즐기러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즐겨지도록 재생산되었다." 는 이론이다. 부정 할 수 없는 것은, 누구나 일정의 취향을 가지고 있고 그 취향을 만족시키는 문화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만의 취향이라 여기게 되는 그것이 이미 모두 계획적으로 생산 된 것이기 때문이다. 스릴러는 이런 B급 영화의 영역에서는 탈피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유주얼 서스팩트>, <원초적 본능>, <양들의 침묵> 등이 그것이지만, 이런 뻔한 고스톱에서 탈피하면서도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작업은 헐리우드에서도 쉽게 하지 못하는 장르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화의 기본 속성이 상업주의이기 때문에 이런 식의 꼼꼼한 사고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군의 감독들이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영화를 승화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반 영화에서는 얻을 수 없는 기대와 흥분이다. 뻔한 고스톱으로 그날의 피로를 그날에 푸는 200원짜리 관객이 있는가 하면, 집 팔고 논 팔아 손모가지 걸고 화투짱 치는 타짜를 꿈꾸는 관객도 있는 것이다. 이제 스크린 저편에서는 창조자라는 영역에까지 발을 들이밀고 있는 감독이 자기 패를 깔아 놓은 것이다. 이것은 결코 짜고 치는 고스톱에서는 얻을 수 없는 기대와 흥분, 바로 그것이다. 초짜가 이 판에 끼어 들었다가는 여지없이 수면에 빠지거나, 성질이 잔뜩 나거나, "내 다시는 깐느를 찾지 않으리" 떠나가는 것이다.
 

 이 작가주의 적인 감독들도 두 개의 부류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적당히 관객을 만족시키면서, 거의 눈치 채지 못하게 속셈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는 역시 채플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채플린의 영화는 백 명의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백 명의 관객에게 모두 다른 것을 보여준다. 우선 채플린은 시나리오에서 편집까지 모두 맡아하는 전지적인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촬영에 따르는 스텝의 손길 하나 하나까지도 모두 채플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채플린의 정신이 그대로 녹아있고, 이 정신이 녹아 있기 때문에 저마다 각기 다른 것을 보고 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 목을 칼로 내리치고 싶었던 영화 중에 하나인 한국 영화 <무사>에서는 김성수 감독의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의 매력 남 정우성과 국민배우 안성기, 중국 로케의 화려함, 장 쯔이의 특수성, 그리고 기획과 마케팅.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타일에 그나마도 최고 수준에는 거리가 멀다. 헐리우드에서 약 20여년 전에 유행이 끝난 제품을 수입해서 놀래고 호들갑 떠는 격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장통 무대에 서슴없이 끼어 든 장 쯔이의 행위에서는 독특한 홍콩문화의 마인드가 드러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장 이모우 감독의 영화 <인생>의 세계적인 반열의 배우 공리가 주성치 영화 <당백호점춘향>에 서슴없이 출연하는 그런 것이 바로 홍콩의 독특한 특징일 것이다.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채플린 타입의 작가주의 감독의 계열에는 주성치도 포함이 된다. 이런 타입의 특징은 무서울 정도로 관객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으며, 관객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둘의 공통점은 코미디배우라는 것이다. 코미디가 가지는 풍자의 요소는 굳이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떤 관객들은 죽을 때까지도 주성치의 영화에서 코미디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의 관객들 중에는 주성치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주성치 영화의 풍자가 현대에 적절하게 들어맞는 이유는, 채플린이 그 비극적 현실을 풍자 한 반면에, 주성치는 희극적 현실을 풍자했다는 것이다. 채플린의 세계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웃음으로 이겨내야만 하는 것" 이었다면, 주성치의 세계는 "어찌 봐도 그저 웃긴 세상"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 역시, 그야말로 주성치에 의한 주성치의 영화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류의 감독들은 상업적 요소를 많은 부분 포기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감독들이다. 나는 이 감독들이 뭔가 영화를 잘못 생각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나를 골치 아프게 한다고 여긴다. 이 감독들의 영화는 배고픈 문학도처럼 비쩍 말라있고, 광적이다. 고흐나 고갱처럼 고집불통에 통뼈를 가진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불행히도 이 부류의 감독들을 나는 거의 알지 못한다. 김기덕, 홍상수, 이창동, 이미연 등의 메이저급 감독들이 이 길을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중에서 이미연 감독은 아직 메이저급이 아니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버스정류장> 이후로 단 한편의 영화가 없다 하더라도(그럴 리는 없겠지만) 한국 영화사에 남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66년 모스크바 영화학교를 다니던 비탈리 카넵스키는 졸업작품을 만들던 중 강간죄(강간죄를 빙자한 사상범)로 몰려 8년 반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는 이 영화의 제목만을 안고 감옥의 벽을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는 77년에야 졸업영화를 만들 수 있었지만「반동적」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사장됐다. 그 뒤 카넵스키는 모스크바 영화사에서 엑스트라와 스태프 보조 일로 근근히 살아갔다. 몇 년 뒤 모스크바 필름 소장 알렉세이 게르만의 호의로 남들이 쓰다 남은 필름을 모으고, 주변에서 비슷한 이유로 버림받은 스태프들을 이끌고 시베리아 스촨에 가서 3개월간 영화를 찍었다. 그는 이 영화가 자신의 마지막 영화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 졸업작품 제목이었던<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영화는 손이 베일 정도로 거친 흑백필름으로 되어 있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비상업적이다. 때문에 영화의 특징에 반드시 상업주의 경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면, 이것은 영화이되 영화가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그저 한 끼를 굶었을 뿐이다. DVD로는 출시가 되지 않았고, 스크린에서 보기도 불가능했다. 소설이나 시, 그림이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반면에 연극이나 음악, 영화는 공간에 큰 제한을 받는다. 이것은 독자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비디오는 무조건 화면의 비율 상 20%를 잘라먹는다. 거기에 음향과 관객 등 여러 가지 불안정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에 작품 감상에 제한 요소가 많다. 물론 그저 놀이 문화라고 하면 이 정도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배경의 이해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 배경의 실감이 현재의 우리와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몰입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가 너무 관객을 쉽게 몰입시키기 때문에 현실비판이 어렵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연극에서 '부조리극'이나 '낯설게 하기'로써 가상 현실로의 관객 몰입을 막으려 시도하였다면, 이 영화에서는 순수한 리얼리즘을 통해서 관객의 몰입을 억제한다. 이 영화에는 드라마틱함이 없고, 자칫 노출되기 쉬운 감독의 의도도 절제되어 있고, 하나의 현실 하나의 공간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나는 몰입을 통한 감동을 원했으므로 유치한 방법으로 한끼를 굶고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볼 때의 관객의 시선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옆 사람과 이야기하며 보는 것, 팝콘을 집어먹으며 보는 것, 핸드폰을 켜 놓고 보는 것, 이것은 시선을 억제한다. 술에 취해서 보는 것, 배가 부른 상태에서 보는 것, 슬픈 감정으로 보는 것, 심심풀이로 보는 것, 수업 리포트용으로 보는 것 등은 영화의 종류에 따라서 적절하게 취할 수 있는 시선이다. 성장영화 같은 경우는 그 나이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다양한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관객들도 다양한 시선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영화의 경우 배고픔의 체험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것이 큰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나는 결국 몰입 할 수 없었다.

  발레르카, 갈리아, 두 아이가 나온다. 발레르카는 남자아이, 갈리아는 여자아이. 두 아이는 서로를 좋아한다. 두 아이는 모두 죽는다. 두 아이가 죽기 바로 직전에 발레르카는 노래를 부른다. 사실 발레르카는 영화 안에서 시종일관 노래를 부른다. 단 한번, 죽기 바로 전에 갈리아는 자기를 위해 노래를 불러 달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는 배경음악이 쓰이지 않는다. 다양한 스테레오 시스템이나 그래픽이 사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발레르카와 갈리아가 사는 스촨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없는 것들과 있는 것들을 보여준다. 있는 것들은 공포와 추위, 배고픔, 아이들, 슬픔, 정신병자, 아이들, 학교, 배급되는 밀가루, 눈과 빙판, 낡은 기차, 약간의 희망, 미친 여자, 카메라를 향해 욕하는 배우, 석탄, 몸 파는 엄마, 움푹 파인 눈들, 헤진 옷들, 썩은 이빨, 죽어버린 웃음이다. 그리고 없는 것들은... 오직 관객에게만 보일 수밖에 없다.
 

 나는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를 말하기 위한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이 영화가 모범이 될 수도 없고,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자신도 없다. 하지만 영화로서는 거의 드물게 이것이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복제기술인 영화에는 원본성을 뜻하는 아우라가 있을 수 없지만, 간혹 몇 개의 영화에는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오직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현실을 표현 해냈을 때이다. 미술작품이 아우라를 지니는 것은 복제되지 않는 하나 뿐인 온전성 때문이지만, 때때로 영화는 아무리 복제되더라도 훼손되지 않는 아우라를 지니기도 한다. 그것은, 어쩐지 이것을 볼 때는 목이 뻣뻣해지고, 자세를 가다듬게 되고, 무어라도 피드백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를 지니게 됨을 말한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관객의 아우라이다. 영화는 복제된 기술이라 하더라도, 관객은 하나 하나가 모두 독자적이다. 소위 일류대를 나온 사람들에 의해 쉽게 타겟팅이 되어서, 바라는 바 그대로 침흘리며 질질 끌려나가는 관객을 상상하는 것은 기분이 나쁜 일이다. 주성치의 영화처럼 희미한 무엇이 지속적으로 깔려 나오는 영화는 관객의 철학이 대입되지 않고는 그 무엇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그렇다고 그런 철학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그것은 문화예술의 영역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비탈리 카넵스키의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를 생각 해보자.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싸구려 촬영기재들을 가지고서 영화를 촬영하는 카넵스키를 떠올려보자. 카넵스키는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영화를 좋아하고, 러시아를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자아, 이제 취미를 영화감상이라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의 취미가 영화감상인 이유는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 영화와 그들이 영화에서 발견한 것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이 영화를 보는 이유를 생각 해 보자. 혹시 그 이유가 그날의 피로를 그날에 풀기 위한 것은 아닌가. 유한양행에서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병 값이 원가의 전부인 물약(자양강장 및 피로회복제)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유한양행의 기업이념은 상업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발레르카와 갈리아를 알게 된 것이 행복하다. 발레르카가 부르는 마지막 노래가 귓가를 떠나지 않고 맴돈다. 이 귓가에 맴도는 노래가 나의 아우라의 일부가 된다. 영화와 나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 진 것이다. 이렇게 발레르카와 갈리아와 스촨이 다시 부활한다. 마치 영화의 제목처럼. 이것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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