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낮에 신문 기사를 보았어. 영화 두 편을 잠깐 소개해 주는 기사였는데, 올해거나, 작년이거나, 그 전년도에 미국에서 개봉했던 영화에 나오는 대사를 말해주었어. 제목이 별로 좋지 않았을 거야. 기억 못하는 걸 보니.

"유령만이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는 대사의 인용이 있었어.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 그야 물론 사랑에 빠졌던 어떤 날의 나겠지. 지금은 물론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데, 영원한 사랑만을 믿지 못하겠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거에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어제 꾼 꿈이나, 잘못된 조작된 기억이 아닐까, 제 아무리 유치함을 내 개성이라 믿고 살아온 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었던 걸까,
정말?

방금 저녁을 먹고 커피 한 잔을 사러 자바커피를 가는 길이었어. 지하도를 걷고 있는데 공중전화 앞에서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고, 그 앞에 지하철 관계자로 보이는 한 남자가 서서 어딘가 연락을 취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 남자 참 무뚝뚝하게도 그냥 서서 아무 것도 안하고 지키고만
서있었어.

영화 같은 데 보면,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말을 걸거나 얼굴이라도 툭툭 치거나 몸이라도 흔들거나 좀 추스려 줄 텐데 말이야. 주위에 마침 퇴근시간이라 무척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나 또한 기껏 쓰러진 여자 한 명 때문에 내 귀한 시간을 낭비 할 수 없다고, 커피가 더 소중하다고 휘리릭 뽕, 지나쳐 갔지.

그러다 생각했어.

이런 상황에 '양심추적' 같은 프로그램 팀이 나타나서, 사실 이것은 시츄에이션이었고, 왜 그냥 지나치셨는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왜냐구요? 못생겼으니까요."라고 대답해야지.

그리고 나서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내 머리를 툭툭 치면서 말을 할 거야.

"나를 봐봐. 내가 만약 당신과 10분 이상 얘기 하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미녀이거나 미남이기 때문이야"

 

훗.

이 얼마나 효과적인 멘트인지. 내 발언을  TV라는 중요매체를 통해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후로, 나와 있는 시간을 보다 좋아하게 될 거야, 물론 내가 '여자가 못생겨서 안도와주고 이쁘면 도와주는' 싸가지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더라도,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이사람이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기뻐하겠지.

 

훗.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주문했고, 포장했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어. 어느새 달려온 구급대원들이 이 여자를 양쪽에서 잡고는 질질질질 끌어서 구석진 곳에 눕혀두더군. 잠깐 기절을 했고 위급한 건 아닌가봐. 그냥 두면 한 시간이면 깨겠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어.


정말이지 이 구급대원들도 영화와는 다르더군. 질질질질 끓어다가 털썩 구석에 눕혀두고, 누구 하나 쭈그려 앉아서 세심하게 살펴봐 주지를 않아. 이 여자는 참 이쁘지도 않으면서 뭘 믿고 기절을 한 걸까...

그리고 일 하러 왔어. 알겠어? 광고란건 이런 사람들이 만드는 거야. 현실에는 없고 상상하면 기분이 좋은 그런 상황을, 내게 일어나면 좋겠지만 정작 내가 하지는 않는 그런 일을, 팔아먹고 있어.

훗.

왠지 기분이 좋아져.

젠장, 그 여자 구경하다가 커피가 식었잖아.


 

추신: 혹시 지금 영원한 사랑을 믿고있는 사람은 얼른 깨닫도록 해. 식스 센스를 발동해서 어디 가서 친구 유령이나 찾아 보라고...

 

 

 

 

못생겼다고 사람이 기절했는데 도와주지 않다니, 라고 분노를 하거나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기쁜 일일 거야. 왜냐하면 그 사람은 분명히 그런 상황에서 발 벗고 나서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일 테니까 말야.

 

그런데 재밌게도, 오늘 금요일 서울역 지하도를 지나가는 언뜻 봐도 1분에 수 백명이 지나가던 그 상황에 '못생겼다고 도와주지 않는 사람' 밖에는 없었는가봐.

 

그래 어쩌면, 도와주고는 싶었으나 너무 바빴거나, 도와주고는 싶었으나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튀는 행동이 내키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그 기절한 사람에게 뭐가 다르겠어. 못생겨서 피해간 사람이나 튀는 행동이 부끄럽거나 긴장되서 피해간 사람이나.

 

적어도 나는 이뻤으면 적극 도와줬을 거야. 일단 인공호흡을 했을 지도 모르지. 심장 맛사지 같은 것도. 아무튼 이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만한 행동을 창피를 무릎쓰고 했을 거야. 그러니까 적어도 나는 10명의 여자가 쓰러져 있다면 그 중 한 명에게는 꽤 도움이 될 거야.

 

수백명 앞에서 불쑥 나서서 껴안고 일어나세요! 정신 차리세요! 말 못하는 사람은 10명 중 1명도 구하지 못하겠지. 따라서 나의 승리.

 

내 삶은 나날이 승리를 향해 뻗치는구만. 그 여자가 지금쯤 숨이 끊어졌으면 좋겠는데, 더 나아가 내일 아침 뉴스에, '사람들 무관심 속 죽어간 여인'이라고 기사가 나고, 기절 후 사망까지 1시간 동안 지나쳐간 사람만 천여명, 그 누구도 이 여인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CCTV에라도 내가 좀 나오면 좋겠는데...

 

 

 

 

'so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05.12.12
개떡같은 글이 있어서  (0) 2005.12.09
내일은 무슨 날인가  (0) 2005.12.08
가만히 가라앉아가는 소화제를 상상하며 ...  (0) 2005.12.08
1997년 봄  (0) 2005.12.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