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10일에 어떤 커뮤니티에 올린 글
오늘 새벽 세 시에 전화를 받았지.
맹꽁이에게서 온 전화였어.
떡밥은 여전히 연꽃이라고 부른다만
나는 맹꽁이라고 불러주지. 그게 좋다는데 뭐.
이젠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느냐고 물어 본 것 같아.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지.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의미는 두지는 않지 않느냐고 물어 본 것 같아.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했지.
내가 맹꽁이에게 두는 의미는 어디까지나 그런 의미와는 다르다고.
보나마나 또 어젯밤에 술 먹고서 전화해서
자기가 무슨 말 했는지 하나도 기억 못 할거야.
내가 맨 처음에 여기 죽은 물고기 만든 이유 써 놓은거 봤지?
하고 싶은 말 대충 가려서 하는 커뮤니티들이 싫어서 그렇다고 한 거.
그래서 우리는 정모 없어.
만나서도 여기처럼 하고 싶은 말 할 거 아니라면.
그런 만남 필요 없어.
내가 이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고.
내가 하는 이 말을 상대방은 어떻게 받아 들일까 염려하고,
대체적인 도덕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유의하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좀 더 매력적인 자신을 보여주려고 하고,
그런 만남 필요 없어. 적어도 여기서는.
그런 만남은 매력에 따라 이해 관계가 얽히고 여러가지 이득이 교환 될 수 있는
사회적 관계에서나 필요하지. 우리는 어디까지나
물고기적 관계를 맺자고. 기억력 3초. 부끄럼 따위 없이.
그렇게 부끄럼 따위 없이 말하자면
맹꽁이는 내게 의미가 있어. 많이 있어.
하지만 그건 늘 악몽에 시달리고, 말도 잘 못하는 맹꽁이에 있어서야.
나이 27세에 간호사로 근무중인 명옥이에게는 아니야.
예전에는 <양치는 소녀>에게 의미를 두었고,
또 <치장이>에게도 의미를 두었어.
이번이 세 번째 변신인 셈이지? <맹꽁이> 말야.
내가 의미를 두는 건 이 양치는 소녀, 치장이, 맹꽁이야.
감수성 예민하고, 삶을 보는 눈도 있고, 늘 도피의식 가득한 생명체 말야.
그렇게 하고 싶은 말만 하려고 전화를 하진 말아.
어차피, 내가 별로 동의나 이해를 구하고 싶어서 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 알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슬프고 싶어서 슬퍼하는 것처럼.
너무 슬퍼지지 않으려고 하진 마.
가만히 바닥까지 더듬어 보면
슬퍼하고 싶기 때문에 슬픔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을텐데.
제발, 책 좀 보라구.
하다못해 류시화 번역책이나,
법정스님 책, 오쇼 라즈니쉬, 달라이 라마, 크리슈나무르티
탓닉한, 에오선사, 사르트르, 니체, 장자. 노자.
이런 거 심심할 때 들여다 보면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순 없어도, 왜 슬픈지는 알 수 있을거야.
당신이 슬픈건, 내가 의미를 당신이 원하는 방향 그대로 두어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야.
당신이 슬픈 진짜 원인은 따로 있고, 표면에 내가 있을 뿐이라고.
여기 쯤에서 다만 내 글투가 뻣뻣하다는 이유로 저항감부터 드는 이가 있다면
정말 축하할만치 보편적인 인간인 셈이고. (잘 먹고 잘 살거야, 머리 굳었으니)
적어도 내가 아는 맹꽁이는 내가 말하는 바를 알 수 있을거야. 편견 없이.
사람이 슬픈 건 어디까지나 슬프고 싶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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