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사이먼 싱, 영림카디널
직관과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이는 확률 문제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 ‘생일 분포’에 관한 문제를 들 수 있다. 축구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23명의 사람들을 상상해 보자(22명은 선수이고 1명은 심판이다). 이들 중에, 생일이 같은 두 사람이 섞여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대상 인원은 23명밖에 안 되고 가능한 생일은 365가지나 되기 때문에, 언뜻 보면 이 확률은 매우 작아보인다. 이런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10% 미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수학적인 확률을 계산해 보면 그 결과는 50%가 조금 넘는다. 다시 말해서 23명 중에 생일이 같은 두 사람이 섞여 있을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더 크다는 이야기이다.
확률이 이렇게 크게 나오는 이유는 ‘경우의 수’가 크기 때문이다 즉 인원수는 23명밖에 안 되지만 이들 중 임의로 두 사람을 선정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이 문제를 해결할 때, 우리는 개개인의 생일보다는 ‘한 쌍의 사람들’의 생일을 살펴보아야 한다. 운동장에는 23명이 뛰고 있지만, 이들 중 임의로 두 사람을 선택하는 방법은 253가지나 된다. 예를 들어 임의의 한 사람을 미리 선정해 놓고 나머지 22명 중 1명을 그와 짝지어주는 방법은 22가지가 있다. 그 다음, 두 번째 사람을 선정하여 나머지 21명과 짝을 지어주는 방법은 21가지이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 사람은 20가지, 네 번째 사람은 19가지… 이렇게 끝까지 경우의 수를 계산한 뒤에 모든 경우를 더하면, 253가지의 짝짓는 방법을 얻게 되는 것이다.
23명 중 생일이 같은 두 사람이 적어도 한 쌍 이상 섞여 있을 확률이 50%가 넘는다는 것은 우리의 직관적 판단과 비교할 때 너무 큰 것 같다. 하지만 이 결과는 수학적 계산을 통해 얻어진 것이므로 반박의 여지가 없다(23명 중 임의로 선정한 한 쌍의 생일이 서로 다를 확률은 364/365이며, 임의의 세 사람의 생일이 모두 다를 확률은 364/365 X 363/365이다. 따라서 23명 중 생일이 같은 두 사람이 하나도 없을 확률은 364/365 X 363/365 X … X 343/365 = 47.59%이며, 생일이 같은 커플이 적어도 한 쌍 이상이 섞여 있을 확률은 100%에서 이 확률을 뺀 값, 즉 100% - 47.5% = 52.41%가 된다). 복권업자들이나 도박사들은 이렇게 엉성한 사람들의 직관적 판단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고 있다. 만일 여러분이 23명 이상 모인 연회에 초대된다면 한번 내기를 걸어봄 직하다. 대상 인원이 23명일 때, 생일이 같은 한 쌍의 커플이 있을 확률은 50%가 조금 넘는 정도이지만, 인원수가 많아질수록 이 확률은 급속히 커져서 30명에 대한 확률은 거의 70%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이 정도의 사람이 모여 있을 때에는 당연히 ‘생일이 같은 사람이 있다.’는 쪽에 거는 것이 유리하다.
파스칼은 한 술 더 떠서, 종교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에도 자신의 이론을 적용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도박사가 돈을 걸면서 느끼는 흥분감은 그가 이겼을 때 따게 될 금액에 이길 확률을 곱한 값과 같다.” 파스칼의 말이다. 그는 이 논리를 종교적인 신앙심의 가치에 다음과 같이 적용하였다. 영원한 행복은 ‘무한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선행을 쌓아서 천국으로 들어갈 확률은(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아무리 작다 해도 분명히 ‘유한한’ 값을 가진다. 따라서 종교란 판돈을 걸 가치가 있는 일종의 확률 게임이다. 왜냐하면 ‘무한한’ 가치에 ‘유한한’ 확률을 곱하면 ‘무한한’ 기대값이 나오기 때문이다.
페르마가 발견했던 새로운 수 중에 ‘친화수(amicable numbers)’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2000년 전에 피타고라스가 발견했던 ‘완전수’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친화수는 한 쌍의 수로 이루어지며, 한 수의 약수들을 모두 더한 값이 나머지 수와 같아지는 경우를 말한다. 피타고라스 학파(학회)의 학자들은 220과 284가 친화수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220의 약수는 1, 2, 4, 5, 10, 11, 20, 22, 44, 55, 110인데 이들을 모두 더하면 284가 된다. 또한 284의 약수는 1, 2, 4, 71, 142로서 이들을 모두 더하면 220을 얻는다. 따라서 한 쌍의 수 [220, 284]는 친화수이다….
220과 284 이외의 또 다른 친화수는 오랜 세월 동안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636년에 이르러 드디어 페르마에 의해 새로운 친화수 쌍이 발견되었다(17,296과 18,416). 그다지 심오한 발견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페르마가 그만큼 수를 잘 다루었고 또 그토록 지루한 계산(독자들도 상상이 라리라 믿는다)을 해낼 정도로 수를 사랑했다는 좋은 증거이다. 그 후에 데카르트는 세 번째 친화수(9,363,584와 9,437,056)를 발견하였으며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무려 62쌍의 친화수를 찾아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비교적 작은 수로 이루어진 친화수를 간과해 버렸다. 1866년에 니콜로 파가니니라는 16세의 이탈리아 소년이 뜻밖의 친화수 쌍(1,184와 1,210)을 발견한 것이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것은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끔찍하게 어려운 일이지만, 정리가 주장하는 내용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간단하다. 물리학이나 화학, 또는 생물학 등의 분야에서는 이처럼 단순 명료한 주장이 오랜 세월 동안 검증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을 수가 없다. 벨은 그의 저서 <최후의 문제>에서 말하기를,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증명되기 전에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라고 했다.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었던 아라고F.Arago는 오일러의 천재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일러가 계산하는 모습만 보면 그가 구구단을 외우고 있는지, 아니면 가장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는지 분간 할 수가 없다. 그의 모습은 마치 바람에 몸을 내캍긴 채 활강하고 있는 한 마리의 독수리를 연상케 한다.”
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1의 제곱근, 즉 √1 은 1이다. 1 X 1 = 1이기 때문이다. 또한 -1도 답이 될 수 있다. 음수를 두 번 곱하면 양수가 되어, (-1) X (-1) = +1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의 제곱근은 +1과 -1의 두 개이다. 제곱근이 여러 개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1의 제곱근은 얼마인가?” 이 말은 사실 해결이 불가능했다. 같은 수를 두 번 곱한 결과는 항상 양수이기 때문에 +1이나 -1은 -1의 제곱근(√-1)이 될 수 없었다. 수직선상에는 √-1을 위한 자리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질문 하나 때문에 완전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구겨진 자존심을 추스르며 하는 수 없이 새로운 수의 개념을 받아들여야 했다.
봄벨리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새롭게 탄생한 수 – 이것이 바로 i라는 단위로 표현되는 ‘허수’였다. ‘-1의 제곱근, 즉 √-1은 얼마인가?’라는 난해한 질문에 어떻게든 답을 내보려고 어거지로 만들어낸 듯한 인상을 주긴 하지만, 사실 음수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되던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었다. ‘0에서 1을 빼면 얼마인가?’라는 황당한 질문에 봉착한 힌두의 수학자들은 어떻게든 답을 내보려고 안감힘을 쓰다가 기존의 양수만으로는 답을 낼 수 없음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음수의 개념을 도입했던 것이다. 허수의 경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음수는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직접 응용할 수 있는 반면(예를 들어 ‘채무’나 ‘과거의 시간’ 등은 음수로 표현하는 것이 편리하다), 허수는 응용할 만한 분야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17세기 독일 수학자 곳프리트 라이프니츠는 허수의 성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허수란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넘나드는 신성한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낸 멋진 도구이다.”
오일러의 동료들은 그가 실명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상상력과 사고력이 깊어졌다고 했다. 그가 달의 위치를 ‘반복 알고리즘’으로 거의 정확하게 계산해 낸 것도 완전히 실명한 뒤의 일이었다. 달의 위치를 계산하는 문제는 뉴턴을 비롯하여 당시 유럽 최고의 수학자들도 해결하지 못한 난제였기 때문에, 유럽의 황제들은 오일러가 수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냈다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 수리철학자였던 콩도르세 후작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세상에 알렸다. “오일러는 삶과 계산을 멈추었습니다.”
무한대보다 분명히 작은 양도 역시 무한대가 된다는 이 결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독일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무한대!- 어떤 질문도 이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어떤 개념도 이보다 더 인간의 지성을 자극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개념도 이처럼 모호한 채로 남아있지 않다.”
“매미의 생명 주기가 이렇게 긴 이유는 무엇인가?” – 곤충학자들은 이 질문을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혹시 매미의 수명과 ‘소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매미의 사촌뻘 되는 magicicadatredecim(십삼 년 매미)이라는 학명의 곤충은 13년의 수명 주기를 갖고 있다. 혹시 소수의 수명을 사는 것이 종족 보존에 무언가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일까?
매미의 긴 수명을 설명하는 그럴듯한 이론이 하나 있다. 먼 옛날, 매미의 몸 안에 주로 서식하는 기생충이 있었는데, 매미는 가능한 한 이 기생충이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피했다는 것이다. 만일 기생충의 수명이 2년이라면 매미는 2로 나누어 떨어지는 수명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매미와 기생충의 수명 주기가 대대손손 일치하여 종족 보존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생충의 수명이 3년이라면 매미는 3의 배수에 해당하는 수명을 피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화해 온 매미는 결국 기생충의 수명이 몇 년이건 간에 이들과 수명 주기를 달리하는 최선의 방법이 소수에 해당하는 수명을 사는 것임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17은 어떤 수로 나누어도 떨어지지 않으므로, 기생충의 수명이 17년이 아닌 한, 매미의 가계는 효과적으로 기생충을 피할 수 있다. 만일 기생충의 수명이 2년이라면 매미의 후손과 기생충의 후손은 34년에 한 번식 만날 것이며, 기생충의 수명이 16년인 경우에는 272년(16 X 17) 만에 한 번씩 만나게 된다.
그런데, 매미가 이 정도로 똑똑했다면 기생충 역시 바보는 아니었을 것이다. 기생충은 매미의 몸 속이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도 종족 보존을 위해 가능한 한 자신의 수명을 매미의 수명과 일치 시키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매미의 기생충이 17년을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매미는 애벌레의 모습으로 16년을 지낸 후에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숙주의 몸에 들어가기 위해 16년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인 발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자신의 수명을 17년으로 늘이려고 애를 썼다 해도, 거기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다. 수명이 17년이 될 때까지 진화하려면 ‘16년의 수명’을 가진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이 단계에 이르면 갓 부화도니 기생충이 이제 막 밖으로 나온 매미와 마주치는 운 좋은 경우는 272년 동안 단 한 번 밖에 발생하지 않는다. 둘 중 어느 경우이건, 매미는 소수해(年)의 수명을 살면서 기생충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해 왔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현재 매미의 몸 안에서 기생충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기생충들은 매미의 수명을 따라잡으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해왔지만, 그들의 수명이 ‘마의 벽’과도 같은 16년에 이르던 그 순간부터 향후 272년 간 매미를 보지 못하고 고생하던 끝에 모두 멸종해 버린 것이다. 만일 이 논리가 사실이라면 앞으로 매미들은 굳이 17년을 살 필요가 없다. 그들을 못살게 굴던 기생충들이 이 땅에서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알가로티는 여성들이 사랑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인들의 경박한 대화체를 통해 뉴턴의 법칙을 설명하는 식으로 책을 저술했다. g나 가지 예를 들자면 책에 나오는 한 여인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뉴턴의 중력법칙을 설명하자, 이를 듣고 있던 다른 여인은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그거 정말 재미있네…가만,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게 또 있어. 사랑이 바로 그런 거라구. 8일 동안 못 만난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64배나 사랑이 식어버리잖아?”
볼프스켈은 사실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천재적인 수학자는 아니었으며, <페르마의 마지막정리>를 증명해 낼 만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그는 <페르마의 정리>와 함게 영원히 후대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고, 수천 명의 수학자들로 하여금 <페르마의 정리>와 사투를 벌이게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이 기막힌 이야기는 아직도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g나 아름다운 여인으로부터 시작된다. 볼프스켈은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이 미지의 여인은 볼프스켈의 구애를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빠져버린 그는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열정적인 감성을 갖고
있었지만, 모든 일을 충동적으로 해치우는 경솔한 성품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자살 일정에 고나한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두었다. 그는 우선 죽기에 알맞은 날을 정한 뒤,
그날 밤
마지막 편지를 마무리짓고 시계를 보니
그는 자리에 앉아 증명 과정의 논리적 오류를 찾아내기 위해
논문의 이곳 저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불완전하게 끝난 쿰머의 논리를 완전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쿰머의 결론을 완전히 뒤집을 수도 있는 나름대로의 증명법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논리적 사고에
완전히 몰두해 있는 사이에 어느새
볼프스켈은 전날 써두었던 유서들을 모두 찢어버리고 간밤에 일어났던 일을 힘차게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가족들이 깜짝 놀랄 만한 결심을 했다.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가 내걸었던 상금은 10만 마르크로,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따진다면 100만 파운드가 넘는 거금이었지만 <페르마의 정리>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학자들이란 엄밀한 증명 없이는 어떠한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는 지독히 까다로운 사람들이 다. 아이언 스튜어트의 저서 <현대 수학의 개념>에는 수학자들의 이러한 성향이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천문학자와 물리학자, 그리고 수학자가 스코틀랜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검은 양 한 마리를 보았다. 그러나 천문학자가 말했다. “그것 참 신기하군. 스코틀랜드 양들은 죄다 검은색이잖아?” 이 말을 듣고 있던 물리학자가 천문학자의 말을 반박했다. “그게 아니야. 스코틀랜드산 양들 중에서 일부만이 검은색이라고 말해야지.” 이들의 말이 한심하다는 듯, 수학자는 하늘을 잠시 쳐다본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너무 성급한 판단을 내린 거야. 스코틀랜드에는 적어도 몸의 한쪽 면 이상의 면적에 검은 털이 나 있는 양이 적어도 한 마리 이상 방목되고 있는 들판이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 이래야 말이 되는 거라구!”
힐베르트의 야심찬 의도는 그의 묘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결국 알게 될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현상론적인
러셀은 자신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2에다 2를 더하면 4가 된다는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생각은 옳습니다.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여러분이 “저 동물이 개인가?”라거나
“이 길이가 1미터보다 짧은가?”라는 질문을 떠올리는 경우가 바로 그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2는 둘로 이루어진 무언가로 표현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2에 2를 더하면 4이다.”라는 명제는 그것을 적용할 대상이 없다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마리의 개에 두 마리의 개가 더해지면 분명히
네 마리의 개가 되지만 만일 더해진 대상이 개라는 확신이 없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러분은 “어쨌거나 더한 결과는 네 마리의 짐승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동물인지, 아니면 식물인지 구별이 모호한 미생물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생명체이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생명체인지, 아닌지조차
모호한 것들도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결국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두 개의 ‘무언가’와 두 개의 ‘무언가’를 더하면 네 개의 ‘무언가’를 얻는다.”
이렇게 말했을 때, ‘무언가’라는 대상의 성질에 대하여 다시 논의를 해야 하는데,
이것으로 모든 논지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저명한 정수론 학자인 앙드레 베일은 이렇게 말했다; “수학이 완전하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완전성을 증명할 수 없기에 악마 역시 존재한다.”
“나는 거짓말쟁이이다!”
“이 문장에는 아무런 증명도 들어 있지 않다.”
괴델은 위 문장을 수학적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즉
결정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순수 수학자는 항상 새로운 문제에 도전하는 것을 즐긴다. 풀리지 않은 문제에 애정을
느끼는 것이다.
시무라는 까다로운 성격이었던 반면, 타니야마는 자유분방하고 게으른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무라는 타니야마의 이러한 기질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자주
실수를 저지르곤 했는데, 그 실수라는 것이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저질러지더군요.
정말이지 신기할 정도였어요. 저는 그것이 부러워 어거지로 흉내라도 내보려고 꽤나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테니가요.
타니야마는 그 방면으로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난 친구였지요.”
타니야마는 ‘멍청한 천재’의 전형이었으며, 이것은 그의 외모에도 잘 나타나 있었다. 그는
구두 끈 조차 제대로 매지 못하여 늘상 구두 끈을 풀어놓은 채로 다녔다…
특히 막다른 길과 마주치거나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지루한 수학적
사고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려면 한 문제에 완전히
집중한 채로 엄청난 시간을 인내해야만 합니다. 다른 생각 없이 오로지 그 문제만 생각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완전한 집중, 그 자체지요. 그런 다음에 생각을 멈추고 잠시 휴식을 취하면
무의식이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때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게 되지요. 완전한
집중 뒤의 휴식 – 이때가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데카르트의 말대로 “초월적인 문제를 논할 때에는 초월적으로 명료해야 한다.”
나툼; ‘나타내다’라는 뜻의 수학 용어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는 반격을 가해오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 피에트 하인
가장 위대한 수학적 증명을 이루어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수학으로부터 가장 위대한
수수께끼를 빼앗아 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원과 사각형이 위상수학적 관점에서 볼 때 동일하다는 이 황당한 말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고무판에 그려진 도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고무판에 사각형을 그린 뒤에 고무판을 당기고,
누르고, 구부리고, 비틀다보면(이때, 고무판을 찢는 것은 반칙이다) 사각형을 원의 형태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무판을 아무리 변형시켜도 사각형을 십자 모양(+)으로
바꿀 수는 없다. 따라서 사각형과 십자 모양은 위상수학적으로 볼 때에도 다른 도형이다.
이런 식의 관점으로 도형을 바라보기 때문에 위상수학은 흔히 ‘고무판 기하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수학적 증명이란, 단순히 질문의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해답이 왜 그것이어야만 하는지를
우리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ps. 언제나 엉뚱한 곳에 가서 삶이나 문학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삶을 알아야지 하고서 삶을 쫓아다니거나
문학을 알아야지 하고서 문학을 쫓아다니다가는
남들의 발견이나 다시 한 번 더 주워듣는 식의 패배감만 느끼게 되고는 한다.
나는 왜 수학을 싫어했을까...
이토록 감동적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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