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상상임신



                           박연준





그렇지만 아버지

자꾸 배가 부풀어 오르고, 손가락이 부드러워져요

미안해요 

당신의 아이는 아니에요


우뚝 서 있는 나의 병정, 저 초로初老의 남자,

눈썹이 흰 소나무와의 키스로

나는 단 한 번에 여자가 됐고

머리칼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펄럭이는 순간

맨 땅에서, 두 발을 비비며 수태했어요,

당신의 아이는 아니지만

우리의 피보다 깨끗한 뱀들의 씨앗이에요

뱃속에 열 갈래 길이 생기고, 나는 웃어요


내 몸에 악착스레 붙어있는 당신 손들

빨판처럼, 달려들면서 뭉개지는 당신 눈동자

당신의 시퍼런 넋이 내 온몸에 씌었지만, 어쩌죠?

나는 뒤돌아 웃어요

웃으며서 수태해요

당신의 아이는 아니지만

기쁘게, 

부풀어 올라요


밤은 휘어지고

나는 온힘을 다 해 당신을 벗어나며

내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당신을 밀치며

떠올라요

떠올라, 웅장한 달이 되어요


육중한 어둠과 살을 섞으며 천천히,

나는 가까스로-밝아져요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수첩 속에는 - 한영숙  (0) 2006.10.01
징검다리 - 문영수  (0) 2006.10.01
별이 박힌 짐승에게 - 박연준  (0) 2006.10.01
가난한 집 장롱 위에는 - 박연준  (0) 2006.10.01
이쑤시개 - 이윤학  (0) 2006.10.0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