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수첩 속에는
한영숙
가로 5cm, 세로 7cm 되는
꽤 바랜 수첩 속에는
모나미볼펜심 서툴게 눌러쓴 낯익은 필체가 고물거리고 있다
‘82年 9月 5日 돼지 딩갓슴’을 시작으로 해서
페이지마다 소, 염소, 토끼들 교배 날짜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98年 6月 10日 소 딩갓슴’을 마지막으로
마저 채우지 못하고 끝이 나있는 남은 페이지 한 장
그 곳엔 오직 잉태의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도수 높은 돋보기로
벽에 걸린 달력 숫자들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을
허리 구부정한 그가
아직도 뒷집지고 골똘히 서성이고 있다
요즘 조금만 심사가 뒤틀려도 그 사람 전화번호 박박 지워버리는
내 수첩과는 달리
이빨 악 물고 산통 참아내는 가축들이
그의 수첩에서 양수를 터트리며 우렁차게 환희를 쏟아냈었다
참으로 애썼다며 말없이
그 등 토닥여주는 갈라터진 손가락마디에는
메추리알만한 관절염이 여전히 팅팅 눈알을 부라리겠지만
그래도 식을 줄 모르는
새 생명이
꽤 바랜 저 수첩 속,
갈피마다 옹알옹알 옹알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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