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훔치다
졸업 후 처음 찾은
학과 세미나실에서 가방을 훔쳤다
문짝처럼 입 벌리고 있었다
시집이라도 한 권 들어있었더라면
사는 집인 줄 알았을 텐데
오늘따라 학교엔 잠긴 문들이 많고
길목 마다 눈빛들이 환하다
스무살 구름이 삐-걱 틈을 보인다
고작, 가방 하나 훔쳤을 뿐인 걸
회색과 파란 색이 섞인
배낭형 northface 가방
책이 안 들었으니 책가방은 아닐 테고
젊음도, 사랑도, 열정도, 텅 비어 있으니
그저 버려진 가방 아닌가
종이가방에 들어있던
늘어난 수영복, 젖은 수건, 바지며 셔츠, 냄새나는 속옷들을
훔친 가방에 옮겨 담는다
오랜만에 느끼는
빠른 지 느린 지 모를 감동
형광등 하나 하나에 마디가 진다
나는 이제 서울로 뜰 것이다
소위 잘 나가는 외국계 광고회사에서
잘 나가는 카피라이터로 인생 뜰 것이다
스무 살 적, 꽉꽉 막힌 미련함은 안녕이다
가방 끈 길이를 내 몸에 맞춘다
가슴 속엔 CC카메라가 꺼진지 오래
졸업 후 2년 간 마음 고생이 많았다
이젠 모든 게 잘 될 것이다
나는 잘 나가는 직장인이니까
가방 정도는, 마음에 드는 걸 가져도 좋을 것이다
이건 그때까지의 별 것 아닌 상징
약간은 하고 싶었던 폭력
내가 나를 업는다
살 땐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