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여자에게
나는 남자입니다.
무엇 때문이 아니라, 다만 남자라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설명하기가 힘든 그런 것입니다.
나는 사회적인 포유류입니다.
사회적인 포유류는, 사회성과 동물성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화이트데이가 그런 날입니다.
나는 화이트데이입니다.
내 앞에서 남자들은 과장하거나 자신을 감추려 합니다.
창피 당할 것을 두려워하면서, 다만 자신은 오해가 두려울 뿐이라 말합니다.
나는 여자입니다.
나는 남자가 괴롭거나, 그 이유가 무엇이거나,
화이트데이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나는 화이트데이의 여자입니다.
오늘은 내게 행복한 날이 될 수도 있고 불행한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 주변에 서식하는 남자들에게 달려있습니다.
나는 어린왕자의 장미입니다.
저의 어린왕자는 화이트데이 때마다
조그만 손에 사탕을 들고 찾아오고는 합니다.
나는 사탕을 한 번도 준 적 없는 원국입니다.
화이트데이에 때가 묻었다면 제 탓입니다만
남이 만든 사탕 따위를 주기는 싫으니까요.
나는 ‘시’입니다.
행복한 화이트데이를 위해
남자가 여자에게 보내는 다섯 편의 ‘시’입니다.
<다섯 편의 시>
하나, 화이트데이에 흉악범이 잡혀간다
흉악범이 잡혀간다
뱀 같은 날씨 속에 알을 낳듯
흉악범이 잡혀 간다
서른 다섯 먹은 흉악범이 잡혀 간다
스물 셋 그의 청춘도 함께 잡혀 들어간다
열 여섯 그의 소년도 함께 잡혀 간다
다섯 살의 그도 잡혀간다
아주 어려서부터 붙잡혀있었구나 싶다
사랑에게
흉악범이 잡혀간다
둘, 화이트데이에 우리는
달 표면에서 발사된 빛이
지구에 도달할 때까지는 약 2초가 걸리므로,
우리는 항상 달의 2초 전 모습을 보고 있는 셈이다
당신이 받은 흰 꽃 한 송이에는
가장 하얀 장미를 고르던 10분 전의 남자가 들어있다
3월의 달빛을 좋아하는 남자가
가장 평평한 시간에 펼쳐놓은 마음씨 위로
물을 축축 뿌리고
다림질하던 몇 시간의 풍경이 녹음되어 있다
꽃은 죽을 것이다
향기는 시들 것이다
당신이 받은 흰 꽃 한 송이를 고르던 남자는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
종아리까지 걷어 올린 츄리닝 바지 차림으로
새빨간 일요일들을 보낼 것이다
3월이면 베란다를 서성거릴 것이다
3월이면 피는 꽃처럼 시들 것이다
그러나 2초 전의 달빛을 60억년 동안 보아왔듯
맡아다오, 10분 전 남자의 향기를
셋, 국화빵 아줌마와 화이트데이
국화빵 아줌마가 국화빵으로 저녁을 때운다
나는 사과소주를 마시고선
강남역 교보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깜빡거린다
국화빵 한 잔을
밀가루 푼 소주처럼 꼴딱 삼키시는 아줌마는
빵 사세요, 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건너오세요, 라는 말도 없이 건너온 길들처럼
제멋대로 피어버린 3월의 꽃잎처럼
나는 목을 세우고
아주머니를 지나친다
뉴스에서는 계속, 화이트데이의 주가 전망을
높이 높이 떠들어댄다
내 사랑에도 주가가 있다면
누군가 한 다발 사주기를
내일 화이트데이에는
국화빵 아줌마도 국화꽃 피웠으면
넷, 모서리 사탕
마음 속에도 모서리가 있다
둥둥 떠다니다
쿵! 부딪치고
쿵! 부딪친다
보고 싶다, 고 말하면
조금 잠잠해진다
사탕을 사러 가야겠다
모서리가 있는 사탕을
그녀도 삼키도록 해야지
다섯, 꽃과 유리와 사탕
꽃을 앞에 두고서도 만지지 못하는 유리는
또 내 꿈속으로 놀러 와서는 잔뜩 꽃을 만지고 간다
내가 눈 뜰 때마다, 가슴에 유리가 잔뜩 박혀있다
아마도 이런 게
사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