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대한민국 01권, 박노자, 한겨레출판, 2001
그들에게는 우리의 ‘자유’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인 개인적 공간과 개인적 시간 등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상적 자유 확립’ 차원의 행동들, 예컨대 술을 권하거나 노래를 시키거나 회식에 초대받았을 때 본인의 취향이나 사정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 등이 그들에게는 이기주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 모두 다 같이”(그들이 가장 잘 쓰는 표현 중 하나)가 술에 취해 음담패설을 주고받고 폭소하거나 노래를 불러대는 데에도 그대로 통용되었다. 그런 자리에서 다른 말이나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사회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크게 봐서는, ‘자본주의’와 ‘세계적 종속’의 거대 담론을 거부하고자 했던 그들이 ‘식구들’의 ‘일심단결’을 우선시하는 가족주의적 풍속의 미시 담론을 절대화한 셈이었다.
우리 후배들이 “花笑檻前聲未聽(꽃들이 난간 앞에서 웃어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와 같은 문장의 아담한 맛을 감상할 줄 모른다면, 그것 또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지켜나가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외화벌이를 위해 베트남 전쟁에서 4~5천 명에 이르는 한국 젊은이가 죽었다 해도,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 건설장에서 노동자 100여 명이 사고와 과로로 고통을 받아 죽었다 해도, 1년에 근로자 몇백 명이 과로사한다 해도, 일단 우리가 지금 북한보다 배불리 현대적으로 살지 않느냐는 식의 논리다.
물론 고통을 받아 죽은 희생자의 유족을 비롯한 ‘고통 담당층’이 지금 현대적으로 잘살 확률보다 계속 고통을 당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점에서 이 논리는 치명적인 허점을 지니고 있지만, …
실제로 박정희가 그토록 기교 좋게 만들어놓은 전근대적 ‘충’과 근대적 군국주의의 연결은, 지금도 그 무서운 결과를 그대로 과시한다. 이미 세계적으로 준핵심부의 경제적인 수준에 도달한 사회 중에서 “군대 갔다오지 않은 친구는 조직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철석같이 믿는 사회는 한국과, 비슷한 세뇌 메커니즘을 지닌 대만 뿐이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자주 당하던 일인데, 한번은 지하철에서 나를 미국인으로 오인한 학생이 크게 용기를 내서 나에게 접근한 뒤 영어로 “친구가 되자”고 더듬더듬 제안한 일이 있었다. 당신은 도대체 친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영어회화 실습을 도와준다면 나도 당신을 도와주겠다”는 대답이 나왔다. 별로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는 그 학생의 투철한 비즈니스 정신에 놀란 내가 내 영어 솜씨로 누굴 크게 도와줄 수 없을 거라고 한국어로(!) 고백하자, 그 학생은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당장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학생으로서는 엉뚱한 놈을 잡았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겠지만, 나에게 이 일은 사실 커다란 발견이었다.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드높은 이상을 과감히 지향하는 이 패기 찬 젊은이들에게는 옛 선조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친교와 친분이 일종의 ‘give-and-take’나 동업관계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서야 감지했다.
친구에게서 영적인 동질성과 도덕적인 지도를 요구하던 사회적 풍토가 ‘네가 나를 밀어주면 나도 보답하겠다’는 식의 새로운 ‘친구’관계로 전락하는 것을 ‘문화의 진보’로 볼 수 있겠는가?
중국과 러시아 교포의 상황을 직접 접해보지 못한 대다수 일반 한국인들이 유일하게 접하는, 한국 보수언론이 보여주는 북방지역 교포의 모습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못살고 불쌍한’ 주변적인 인간이다. 한국의 각종 단체(교회, 병원, 기업)가 ‘어려운’ 교포들에게 베풀어준 각종 ‘시혜’(선교와 교육활동, 의료 봉사, 경제 지원)와 ‘수혜자’들의 열렬한 반응에 대한 보도들은 재러·재중 교포 관련 신문·방송 보도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들의 과거(항일 독립투쟁 등)가 위대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문명화·현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가 ‘우리의 종교, 우리의 의료, 우리의 산업’의 현지 확장이라는 것이 모든 북방 교포 관련 보도의 보이지 않는 심층적 의식이다. 선진적인 ‘우리’와 소극적이고 후진적인 ‘그들’이 대조된다는 것이다. 100년 전 서구와 조선의 관계를 바로 이런 식으로 설정한 영국의 탐험가 비숏(Bishop) 여사나 캐나다 선교사 게일(Gale) 등 조선 관련 전문기의 저자들이 저승에서 이 현상을 지켜보고 있다면, 좋은 제자가 많다며 손뼉을 치고 기뻐할지도 모른다.
남한 보수언론이 보여주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은 북한의 대권 세습을 열심히 비웃으면서도 남한의 거의 모든 재벌이 2세, 3세에게 소유와 경영을 세습한다는 사실을 당연한 일처럼 보도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나본 남한 젊은이들은 대부분 특별히 공부해 보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북한을 ‘후진적인 봉건국가’, ‘못살고 귀찮은 무용지물’로 알고 북한 사람들을 고작 해봐야 ‘불행한 인간’,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후광을 입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진권까지 올라온 ‘우리’와 그 세계체제의 울타리 바깥에서 굶기만 하는 ‘그들’이 벌써 거의 동포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선진적 인사’도 없지 않다. 말하자면,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사라지지 않고 남한 사회를 계속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위주의 반공의식은, 이제 낡아버린 ‘안보 담론’에서 참신하고 멋져 보이는 ‘선진·후진성 담론’ 쪽으로 중점을 옮겼다고 볼 수 있다.
남한에서는 ‘공부’라는 것이 성공의 ‘수단’에 불과하지만, 비자본주의 지역에서는 ‘공부를 위한 공부’라는, 남한 사람들은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일이 가능하다.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지만, ‘현실 사회주의’와의 패할 수밖에 없는 투쟁에서 자신의 미래까지도 희생하는 바로 이러한 태도가 남한을 포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장 사회주의적인 태도다.
어떨 때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함부로 부리는 사회에서 나도 무언가 ‘해먹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평소 화장실에서든 쓰레기 소각장에서든 신과 마음속으로 대화할 수 있으며, 교회나 사찰은 마음이 부르는 때에 가면 된다고 굳게 믿던 나는, ‘소속감과 출석을 통한 영혼 구원’의 논리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본 바로는, 많은 한국 교회가 이와 같은 선민의식과 배타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출석과 헌금에 중점을 두고, 자기 집단의 내부 결속에 사력을 다하면서도 다른 종교 집단을 모두 악마화하는 것이 그 모임뿐인가?
한국이라는 형식상의 ‘민주국가’에서 이와 같은 위헌적 종교 차별이 버젓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던 나는, ‘교인만 모신다’는 한 수도권 사립대학교에 안면이 있는 유명한 러시아 전문가가 계약 교수로 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그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정말 전 교직원이 모두 특정 종교만 믿습니까?”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옛날에 정기적으로 레닌주의 사상강연에 끌려갔듯이, 다들 매주 종교 의례에 가야 하지요. 안 가면 왕따를 당하고 곧 실직하고 말지요. 나는 다행히 외국인이라는 특수한 입장 덕분에 안 가도 별 큰일은 안 나지만, 그래도 주위의 눈치가 썩 좋지 않죠. 한 단체가 똑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원칙은 사실 구소련이나 여기나 뭐가 다르겠소?”
그분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호흡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간섭과 강요로 짓밟던 구소련의 어두운 모습이 다른 형상으로 여기에서도 존재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종교 신앙의 본질을 따져보면, 진정한 신앙이라는 것은 남에게 결코 수비게 보여줄 수 없는, 아주 개인적인 부분이다. 기도하려면 골방에 들어가서 남이 보지 않게 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바로 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앙 증명서’를 요구하는 한국 일부 종교 계열 대학교의 자세는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적인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최소한 원수도 아닌 타종교의 신도 정도는 포용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올바른 종교를 위해서라면 타종교인과 무신론자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선교의 대상’으로 삼는 강요의 악습과, ‘우리 모두 다 같이’ 식의 ‘집단 동질성’만 강조하는 전근대적 패거리주의는 하루빨리 청산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폭력과 약탈의 오명을 쓴 유럽 문화 전체에 회의를 느낀 헤릭 씨는 비폭력과 박애의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있던 불교에 본격적으로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국제적 폭력의 희생자 ‘한국’으로 가서 구산 스님의 문하고 들어갔다. 송광사에서 구족계를 받아 오랫동안 수행생활을 한 헨릭 씨는 구산 스님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헨릭 씨의 말로는 구산 스님의 문도 중에서 스승의 입적(入寂) 이후에 스승의 법을 제대로 이을 만한 계승자(즉 새로운 스승)를 찾을 수 없어서 자신도 다른 외국 제자들처럼 결국 환속했다고 한다. 차츰 낮아지는 한국 승려의 자질은 헨릭 씨와 같은 외국 구도자에게는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선거상황을 보도하는 영자 외신을 접하면서 한 가지 묘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무슨 문제인가 하면, ‘지역 기반’이나 ‘텃밭’ 같은 한국적인 표현을 영어로 옮겨야 하는 기자들이 다른 방법이 없자 궁여지책으로 ‘power base’라는 말을 자주 쓰기 때문이다. 이 말은 미국 정치의 현실을 서술할 때에도 쓰긴 하지만, 역사학에서 주로 신라 말기의 궁예나 견훤 같은 호족·성주들의 통치지역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대 정치인에게 이 표현을 쓰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역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느낌이 묘하지 않을 수 없다.
구타가 완전히 없어질 수 없는 이유는 군대에 대한 지배층의 실제적 요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도 나라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한국의 보수정객과 재벌들이 요구하는 인간상은 평상시에는 ‘상전’을 위해서라면 비자금 조성이든 세금 탈루든 필요없는 자동차 공장 계획 추진이든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복’이고, 유사시에는 아무런 생각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동족을 쏘아 죽일 수 있는 ‘강인한 애국자’다. 출세를 위한 맹종을 유일한 신념으로 삼는 ‘인간 로봇’을 만들어달라는 것이 군대에 대한 권위주의적인 사회의 ‘주문’인 셈이다. 그리하여 인간 존엄성의 개념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 외부로부터의 압박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반발심 등 ‘불필요한 심적 현상’을 졸병의 마음에서 깨끗이 일소해 버리는 것이 군대의 주요 의무가 되는데, 이러한 ‘교육적 과제’를 물리적인 폭력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는 힘들다.
군대에 갔다온 남학생들은 대부분 교수를 공포의 대상인 ‘장교’들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여 교수와 접촉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끼고 최소화하려 한다.
“나는 군인이 될 수 없다.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니까. 나는 기독교인이니까.”
“네가 군인이 되기를 거부하면 참수를 당하게 될 것이다.”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세속의 군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군인이오. 나를 죽여도 내가 남을 죽이지 않을 것이오.”
“악질적 병역 거부죄로 너에게 사형을 선포하노라!”
“하나님을 찬미할지어다!”
위의 짧은 대화는 295년에 로마제국에서 막시밀리아누스라는 기독교인을 재판한 기록이다. 십계명과 산상 수훈에 나오는 “남을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인 막시밀리아누스는 제국을 위해서 남을 죽이는 군인이 되느니 하나님을 위해서 제국의 칼에 죽는 것을 택했다. 막시밀리아누스뿐만 아니라 많은 초기 기독교인이 우상 숭배와 마찬가지로 제국을 위하여 전장에 나가서 살인하는 것을 거부하고 순교를 택했다. 물론 나중에 기독교가 국교화됨에 따라 교회는 교인의 참전 문제에서 국가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내가 한국사를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왜 하필이면 그런 공부를 하느냐고 묻는다. 나의 한국사 연구가 무슨 문제냐고 반문하면, 억압과 폭정, 한 번도 정치판을 제대로 뒤엎어버리지 못한 무기력함으로 얼룩진 이 역사에서 무슨 재미를 찾느냐고 되묻기도 하고, 과거의 폭압과 편견이 오늘날에 와서까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따지기도 한다.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한국 사회만큼 개인에게 사회적 신분을 부여하는 데서 대학에 비중을 두는 곳은 없을 것이다. ‘박사’로 통했던 이승만 때도, ‘육사정권’이라고 불러도 좋을 성싶을 역대 군사정권 때도 그랬지만, ‘386’이라는 유행어가 정치학의 주요 용어로 자리잡은 현재에도 이러한 현상은 바뀌지 않은 듯하다. ‘386’에 의한, ‘386’을 위한 정치가 필요하다면, 80년대 학번은 물론이거니와 아무 학번도 없는, 대학을 나오지 못한 시민들은 이미 정치의 주체에서도,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단 말인가? 대학을 안 나온 소규모 기업의 주인은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아도 ‘서민’이라고 부르고, 대학을 나오면 말단 공무원도 ‘인물’로 받드는 곳이 한국 사회다.
그러나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운동권’이라는 사회 대안세력이 거의 유일하게 생존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대학’을 왜 하필이면 제도권 세력이 이토록 존중하느냐는 질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엊그제 매판재벌을 타도하자고 구호를 외치던 젊은이들을 오늘은 바로 그 재벌들이 별 의심 없이 입사시켜 주고 중책까지 맡기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는 질문이다. 엊그제 쇠파이프를 들고 민족해방을 쟁취하겠다던 사람이 입사한 뒤에 직장 조직의 규율을 잘 지키고 술자리에서도 미국이나 일본 바이어 앞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재벌들이 어디에서 얻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서구적 ‘학파’를 대신하는 패거리적 ‘피라미드’의 형성 원칙은 보통 도덕과 무관한 연령·권력의 서열이다. 호화로운 ‘사은회’와 ‘세배’, 만날 때마다 절하는 등 유교적인 형식이 풍부하게 잔존하지만, 한국적 ‘피라미드’의 내용을 “교수가 퇴직하면 그 논문의 인용 건수가 갑자기 줄어든다”는 명언이 가장 잘 표현한다.
대인관계, 행동양식까지 진보화·현대화하지 않고서는 ‘진보적인’ 이념은 추상적인 공론(空論)으로 남을 것이다.
… 선배가 시킨 대로 ‘미국 침략사’를 달달 외우는 것보다는 그 선배의 술 강권을 한 번이라도 뿌리치는 것이 훨씬 더 진보적인 행동이다.
공식적으로 그들은 ‘일회용 잡직’으로 분류되어 학교와 정식 교원 고용관계를 맺지 않아서 ‘직장’을 사람의 ‘얼굴’로 인식하는 신분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교수로 채용된 직후에 만난 한 동료가 초면에 “누구를 통해서 들어왔느냐”고 물어봤을 때의 당황스러움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보편적인 의미의 인간적 존엄성은 민족주의자에게는 이해가 잘 안 되는 이야기다. ‘보편적인 도덕’도 그렇다. ‘우리’와 관계 있는 것은 본래 다 도덕적이다. ‘남’의 도덕성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남’이 ‘우리’의 적대자로 간주되면, ‘남’이 악마가 되고 ‘우리’가 천사가 되는 흑백논리가 당장 적용된다.
위와 같이 너무나 편안한 ‘탈도덕적’ 논리는 어느 나라의 민족주의에서든 다 찾아볼 수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은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잠깐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놀라울 만큼 자세하고, 인명과 어려운 전문용어들이 꽉 차 있는 이 교과서에는 외국의 침략(‘남’의 적대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한 도덕적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우리’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그러한 평가가 전무하다.
이미 1960년대에 소련의 국가주의와 군사주의를 신랄하게 비웃곤 하던 오쿠자바(B. Okujava)라는 러시아 시인이 ‘군인의 노래’라는 풍자 가득한 가요를 지은 일이 있다. 그 가요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잘못되는 일이 있어도 이게 우리의 문제는 아니다
말하자면, ‘조국의 명령’대로 했을 뿐이다.
아무 죄도 아무 가책도 없는 군인,
그야말로 편안하게 사는 인간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쪽이 늘 타당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사는 것은 그야말로 신들도 부러워할 만큼 마음 편한 태도다.
‘우리’를 신처럼 받들어 믿으면, ‘남’들의 시체는 거름더미쯤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세상의 조갑제들에게 충실한 독자층을 제공해 주는 것이 윤관의 야인정벌(1107~1108)을 ‘민족적인 경사’로 묘사하면서 고려 병사에게 살해당한 수천 명의 여진 주민, 불타버린 여진 마을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 너무나 ‘민족적인’ 국사교과서가 아닌가 싶다. 그 교과서가 시작한 일을 조갑제가 ‘성공적으로 완성’했을 뿐이다. 그 일은 다름 아닌 ‘양심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한 번 그런 ‘해방’을 이룬 사람에게는 세상살이가 부러울 만큼 편하게 된다.
하나의 동질적인 ‘민족언어’를 지닌 ‘민족’을 만들기 위해서 다양하고 국지적인 언어문화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은 언어적 민족주의의 이면이다.
결과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모범생이 ‘화랑도의 애국애족과 임전무퇴의 찬란한 정신’을 달달 외울 수는 있지만, 화랑들의 불교적인 신앙열이나 아름다운 연애풍속은 한 줄도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않는, 또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존재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일단 표현체계가 잡히면, 우리는 그 표현 대상물(the signified)의 존재를 별로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자기 민족의 주요 특징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꺼내는 ‘단골 메뉴’가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우리가 다른 나라를 침범한 적이 없는 민족”이라는 이야기였고, 또 하나는 “우리만큼 민족의식과 주체성이 강한 민족이 드물다(없다)”는 것이었다.
…
위와 같은 자기 평가가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받는 학교 교육을 통해 형성됐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평화 지향’보다 오히려 만주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고구려와 발해의 ‘호전적인 성격’을 훨씬 더 강조했다. 그들에게 안정을 지향한 조선시대 양반관료의 외교적 태도는 지탄받아 마땅한 ‘문약’이자 거의 ‘반민족적 행위’였다. 현재 한국 국사교육이 ‘평화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남한의 ‘방어적 태도’와 북한의 ‘한반도 남반부 적화야욕’을 더욱 부각해 ‘호전적인’ 북한의 ‘민족적 정통성’을 부인하려는 남한 지배층의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수한 복종 능력을 지녔다고 특권층에게 ‘칭찬’을 받는 일반인들도 ‘우리 나라의 성공’을 민족 우수성의 입장에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그러나 약 한 달 후에 그는 대단히 이상한 현상에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자주 찾아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회화 실습이나 고전문학의 독해를 부탁하기보다 주로 숙제를 해주거나 지난번 시험문제를 풀어주기를 원했다. 그들은 러시아어 자체를 배우는 것보다는 숙제를 잘 평가받고 시험을 무난히 통과하는 것을 최상의, 그리고 거의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
바트자갈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끝없이 풍부한 러시아 문학과 영욕이 엇갈리는 러시아의 역사에 돈도 여유도 있어 보이는 그들이 왜 단순한 지적 관심마저도 가지지 못하는가, 그리고 관심이 일단 없다면 왜 굳이 돈을 들여 공부하는가.
한국과 같이 절대적인 소비 중심의 사회에서는 집단의 ‘유행’에 의한 소비와 이를 가능케 하는 경제적 능력을 개인의 지적 관심보다 훨씬 중시한다는 사실은 낭만과 행복의 고려대 시절 최초의 ‘불쾌한 발견’이었다.
그러나 비교적 행복한 그 시절에도 바트자갈은 한 가지 매우 불쾌한 인상을 받았다. 평소에 어려운 노동에 지쳐 사이사이에 흡연과 잡담을 잘 즐기는 한국인 동료들은 주인이나 관리인이 가까이 나타나자마자 갑자기 열심히 일에 몰두하는 행세를 하거나 바트자갈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행세를 하곤 하였다. 바트자갈뿐만 아니라 그의 많은 몽골 친구들도 한국 동료의 이와 같은 이상한 행동양식에 상당히 놀라기 일쑤였다.
속으로 이와 같은 행동을 ‘모범생 콤플렉스’로 이름지은 바트자갈은 그 원인을 자뭇 궁금해 했다. 정말 선생님에게 무조건 잘 보여야 하는 권위적인 학교에서 키워낸 악습인가? 장교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크게 맞아 건강을 잃을 수 있는 군대 때의 습관인가? 아니면, 주인이 노동자들에게 휘두르는 권력과 관련이 있는 일인가? 원인이 어떻든, 인간의 존엄성이 이처럼 쉽게 ‘밥그릇’ 앞에서 짓밟히는 광경을 옆에서 보기가 안타까웠다. 그러나 ‘안 찍히려고’, 주인의 ‘눈도장’을 받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동자와, 이 자세를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위엄을 떨치는 ‘사장님’에게는 과연 그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일까?
최선책인 비폭력투쟁을 할 만한 마음의 힘을 갖추지 못했다면, 차선책으로 폭력투쟁이라도 하는 것이 비겁하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다. “겁이 나서 억압자의 폭력 앞에 움츠려서 보신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분개해서 폭력투쟁이라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낫다”고 말한 사람은 바로 비폭력투쟁의 원조인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다.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의 상황을 제대로 전해주지 않는 주류 언론을 ‘직업적인 거짓말쟁이’로 멸시하고 불신했지만, 그것도 ‘민족적인 혐오’라기 보다는 ‘도덕적인 혐오’였다.
그는 가난한 외국인들을 ‘직업적으로’ 도와주는 사람들(특히 종교 선교단체의 유급 직원들)에 대해서 항상 경계심을 갖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재정적 도움을 주고받는 시혜자와 수혜자의 관계는 본질상 불평등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런 관계를 하나의 직업으로 삼는 시혜자라면, 특별한 내면적 수양을 쌓지 않는 한 수혜자를 ‘자기 밑으로’ 볼 가능성이 매우 많다. 그리고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의식·무의식적으로 인식하는 ‘도움의 대상’에게 자신의 의견과 신념을 알게 모르게 강요할 가능성도 많다.
많은 한국인에게 인종주의적 편견이 이미 고질화되어 있다는 말을 할 때, 내 마음은 억제하지 못할 만큼 흥분된다. 바로 한국인들이 세계 체제의 기본 논리 중 하나인 인종주의의 최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너무 잘 기억하기 때문이다. 머나먼 변방에 나와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러시아 기마병 국경수비대들이 ‘단순한 재미’로 두만강을 넘어오는 조선 농민들을 사냥감 삼아 사살하곤 하던 것이 불과 100년 전의 일이다.
‘외국인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백인 계통의 ‘사회인사’를 찾아다니는 방송사들……’일상적 인종주의’의 문화가 몸에 밴 그들에게 귀찮기 끝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임금 체불이나 인력 송출 시스템의 맹점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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