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김언수, 문학동네, 2006
프랑스 감옥은 죄수를 포도주처럼 다룬다. 축축하고 어두운 창고에서 포도주를 숙성시키듯 달콤하고 쌈쌀한 맛이 날 때까지 오래도록 죄를 숙성시킨다. 그러나 상피에르는 죄를 빨래나 건어물처럼 다룬다. 죄의 습한 기운들이 따뜻한 햇볕에 증발하고 좋은 바람에 날아갈 수 있도록 햇살이 좋고 바람이 잘 드는 높은 곳에 죄를 널어두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지. 일기를 쓰는 삶과 일기를 쓰지 않는 삶. 그것은 역사를 가진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만큼이나 삶의 모든 것에 큰 영향을 미친단다. 수잔, 너는 어떤 삶을 택하겠니?”
그녀는 인간의 존재가 자신이 보낸 과거의 시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저는 이쑤시개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두고 보세요. 22세기가 되면 모든 물건은 인간을 닮아 있을 겁니다. 아니라면 모든 인간이 물건을 닮아 있겠지요. 둘 중에 하나는 분명합니다.”
명동백작은 술자리에서 ‘사랑은 통조림 같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랑에도 통조림처럼 유통기한이 있고, 주의사항이 있고, 가격표가 붙어 있다. 지갑을 열어 자신의 구매력을 살펴본 다음 가격표를 확인하고, 주의사항을 지키면서, 유통기한 내에 사랑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순조롭다.
어쩌면 이 도시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 통조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돈과 깡통따개와 유통기한을 확인할 작은 관심만 있으면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고, 비슷비슷하며, 또 안전하고 맛있는 사랑을 할 수 있으니까.
고양이에게는 결코 주인이 없다. 고양이에게는 친구나 하인이 있을 뿐이다.
“삼십 년이면 정말 고양이로 변할 수 있는 거죠?” 봉곤씨가 불안한 듯 다시 물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고양이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못 들어봤어. 아무래도 곰이나 호랑이가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이고 전통적이지.”
“그게 일반적이고 전통적이에요?” 내가 물었다.
“단군신화에 나와 있잖아. 그러니까 단군신화에 따르면 그 시대 사람들은 모두 곰이나 호랑이로 변하려고 했단 말이잖아? 지금은 모두 연예인이 되려고 하지만.”
기적이 없으므로 권박사는 죽을 것이다. 권박사도 이미 알고 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아내가 없고, 또 아내가 없는데 성적으로 보수적이기까지 해서 자식도 없다.
1997년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최악의 해였다. 은행에서 일하는 내 친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불행은 결코 할부로 오지 않아. 불행은 반드시 일시불로 오지. 그래서 항상 처리하기가 곤란한 거야.”
사학년 마지막 학기인 1996년 가을부터 나는 백스물여섯 곳의 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냈고 모두 떨어졌다. 나 같은 사람은 만나볼 필요도 없다는 건지 일흔 번 정도는 서류전형에서 떨어졌고, 다시 쉰 번쯤은 시험을 치고 떨어졌다. 그나마 여섯 번은 면접을 보고 떨어졌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면접관은 나에게 특별히 내세울 만한 장점이 있냐고 물었다. 중앙에 앉아 있던 그는 사장처럼 보였다. 나는 잔뜩 긴장해서 “특별히 내세울 만한 장점은 없지만 무슨 일이든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입 꼬리가 올라가는 미소를 지으면서 “내가 자네 나이 때는 세계를 정복할 자신이 있었네. 하지만 지금 내 꼴을 보게. 자네처럼 철딱서니 없는 젊은이와 말장난이나 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했다. 그 면접관의 말이 맞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딱서니 없는 대답이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21세기에 아무것도 없다. 서부개척 시대가 아닌 것이다. 21세기에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 검증된 명료한 자격증과 인증서이다.
나는 백칠십팔 일 동안 아침에 눈을 뜨고, 캔맥주를 따고, 캔맥주를 마시고, 맥주캔을 찌그러뜨리고, 땅콩 껍질을 까다가 쓰러져 자는 일을 반복했다. 이따금 변기에 오줌을 누면서 내 몸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때때로 창밖의 태양이 정글처럼 이글거리다가 전선에 걸려 넘어졌고, 희뿌연 자동차 경적소리가 맹렬한 속도로 허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하지만 건너편 연립주택 베란다에 걸려 있는 빨래들처럼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건너편 베란다의 빨래들을 흔들고, 태양이 그것을 말리고, 때가 되면 누군가가 나와 바짝 말라버린 빨래를 털어서 거둬들였다. 무엇을 터고 있는 거지? 나는 건너편 연립주택의 여자가 햇살의 알갱이들을 털어내는 중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어쩌면 이미 햇살에 다 말라버린 남편의 정액을 털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부활할 수 없는 말라비틀어진 정자들. 사실 건너편 연립주택의 여자가 뭘 털어내는지 나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그것이 보이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나는 백칠십팔 일 동안 매일 캔맥주를 마셨다. 사실은 캔맥주를 마시는 것보다 깡통을 찌그러뜨리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부에서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광포한 절망과 무기력이 강바닥처럼 은밀하게 출렁대고 있었다. 아니, 있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그런 것이 있었을까? 인간이 사랑 때문에 정말 죽을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인간은, 아니 적어도 나는, 사랑 때문에 죽지 않는다.
“나는 죽음이 뭔지 알아요. 그것은 시간을 입금해놓은 자신의 통장에 잔고가 하나도 안 남아 있는 상태죠. 이미 다 써버렸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차압당했거나. 별다른 건 없어요. 그저 파산한 삶을 복구할 잔고가 없는 거죠.”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삶을 맞춘다.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 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휴가를 반납하고 대신 특별보너스를 받을 생각이 없냐고 상사가 물어오면
멋있게 뻐큐를 한번 먹여주세요(손가락 동작은 다들 아시죠?).
‘네놈이 아무리 떠들어대도 네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낡고 병든 보수주의지. 네놈은 자신과 다른 것을, 자신의 울타리 밖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우리는 그런 사람을 겁쟁이라고 부르지.’
이 우주적 가르침에 따르자면 한 개체가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의 사이클이란 언제나 ‘자신의 시간’ 단 하나뿐이다. 우리에게 이해심이 부족한 게 아니다. 우리는 애당초 이해란 걸 할 수가 없다. 번개돌이는 달을, 달은 토끼를, 토끼는 번개돌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더 빨리 늙어가고, 누군가는 더 빨리 배가 고프고, 누군가는 더 빨리 사랑했다가 더 빨리 식어버리고, 또 누군가는 그토록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졌다며 밤새 죽을 듯이 울고 난 다음날 새로운 남자와 또다시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늘 하는 말은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왜 사랑하지 않느냐,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 내가 너희만할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너희들은 어쩌자고 이따위냐? 같은 말뿐이다.
에두아르 마네는 <푸른 도마뱀>이라는 책에서 열다섯을 두고 ‘세계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키고 싶은 나이’라고 말했다.
그때가 아마 10월이었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나는 창밖의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회오리바람이 10월의 은행나무 잎사귀들을 둘둘 말아 하늘 높이 올려보내고 있었다. 은행잎들은 회오리바람의 형상을 따라 빙글빙글 돌면서 국기게양대보다 더 높이 치솟아올랐다. 팽이의 가파른 회전처럼, 토성의 띠를 이루는 얼음 알갱이들처럼 은행잎을 매달고 빙빙 도는 바람의 모습은 놀라웠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바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 하고 감탄사를 질렀다. 그때 해골처럼 깡마른 얼굴과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피부 때문에 실리카겔이라는 별명을 가진 윤리선생이 나를 교탁 앞으로 불렀다. “뭘 보고 있었냐?” 나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은 소년의 인생에 몇 번 오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선생도 내 마음을 알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아름다운 회오리바람이 은행잎을 둥글게 감아올리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웃었다. 실리카겔은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실리카겔은 “이 새끼가 돌았나” 하고 말했다. 실리카겔은 시계까지 풀고 내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뺨을 맞는 얼굴은 아프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던 너무나 창백하고 슬픈 것들이 목구멍으로 북받쳐올라왔다. 그래서 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우아악! 우아악! 우아악! 이렇게.
실리카겔은 깜짝 놀라서 서너 걸음 뒷걸음질친 채 멍하니 서 있었고, 아이들도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실은 일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교실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그런데 뚱딴지같이 웬 회오리바람 이야기냐고? 나는 열다섯 살에 평범하고 그저 그런 아이에 불과했지만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분노라는 것을 할 줄 알았다. 이 식사시간을 보라. 이것은 정말 13호 캐비닛만큼이나 비현실적이지 않는가? 단지 직장 상사라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저 돼지 같은 년 어떻게 안 보고 사는 방법 없나?” 따위의 말을 면전에다 할 수 있는가. 그건 솔직히 진짜 돼지한테도 해선 안 되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분노하지 않는다.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내 나이 열다섯에 그 넘치던 분노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어디로 갔을까. 나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나의 분노들이 혹시 호주머니에 있나 싶어 한 손으로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다른 한 손으론 부장의 식판을 배식구에 얌전히 갖다 놓았다. 그리고 배식구를 향해 소리쳤다.
“아줌마! 내일은 멸치미역국 말고 딴 거 좀 먹어요. 아주 지겨워 죽겠어.”
형식의 아름다움에 깊이 매료되었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곰탕 뚝배기에 냉면을 담아오면 그것은 냉면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 만들어진 곰탕일 뿐이다.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가 ‘김언수’ 인터뷰 중
“돈이 필요했으니까요. 집안에 빚이 있었어요. 누나들과 내가 그걸 떠맡았어요. 남들은 몇천만원씩 혼수 해서 시집갈 때 집안 빚을 혼수로 안고 시집간 착한 누나들이에요. 근데 나는 죽겠더라구요. 글도 써야 하고 학교도 다녀야 하는데 학원강사 월급 받아 꼬박꼬박 이자 내며 빚 갚으려니 끝이 보이지 않았어요. 한 십 년 눈 딱 감고 빚만 갚아야 할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때 마침 모 일보에서 일억원짜리 소설 공모를 내놓았기에 직장을 때려치우고 장편소설을 쓰기로 했죠. 그때부터 노트북 들고 이곳저곳을 떠돌았어요. 처음에는 옥탑방을 뺀 보증금으로 버텼어요. 나중에는 친구들이 도와줬고.”
그렇게 꼬박 삼 년 동안 장편소설에 매달렸다. <캐비닛>은 일 년에 걸쳐 쓴 작품이다. 주로 산속의 고시원을 전전하며 썼단다.
“이번에 응모작품이 112편이었다더군요. 그 말 듣고 살벌했어요. 자그마치 112명이 나처럼 산이나 집 안에 틀어박혀서 몇 년씩 글을 썼을 거 아니에요. 장편은 취미생활로 쓸 수 없는 거니까요. 제 경우엔 최소한의 생활비를 대준 친구가 있었어요. 원래 저랑 같이 소설 쓰다가 가난 때문에 장사를 시작한 춘섭이라는 친군데 ‘언수야 내가 세계문학을 위해서 한번 쏜다’ 하며 꼬박 이 년 동안 매달 1일마다 오십만원씩 보내줬어요…. 그놈도 많이 팍팍했을 거예요. 어쨌든 저는 그 돈으로 이 년 동안 돈 안 벌고 처음으로 글에 전념해본 거죠. 그런데 오십만원이라는 돈이 재미있어요. 세끼 밥 주는 고시원비가 삼십삼만원, 그리고 담뱃값 칠만오천원 빼고 나면 옵션이 없어요. 움직이려면 돈이 드니까 그냥 줄창 앉아서 쓰는 거죠 뭐……”
“왜 문학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열심히 밥벌이를 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없는 허영심이 저에게 있기 때문이겠죠.”
“어느 때 자신에게 문학적 재능이 있다고 느끼죠?”
“다른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무모한 선택을 하고, 내 허영심과 이기심에 죄책감마저 느끼면서 육체가 상하도록 글을 쓰고 있을 때.”
모든 서술자는 거짓말쟁이이다. 그것이 이야기의 운명이다.
“사람이 자기를 보호하는 방식이 두 가지잖아요. 하나는 거대한 청동 갑옷을 입고 고슴도치처럼 웅크려서 ‘나는 이렇게 생겼으니까 때릴 테면 때려봐라’ 하는 우직한 스타일이고, 다른 하나는 가면을 만들어서 진짜 자신은 숨겨놓고 사람들이 가면을 때리게 만드는 스타일인데, 저는 후자죠. 대외 모드와 골방 모드가 아주 달라요. 다르기 때문에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가 생기는 거죠. 제 별명이 ‘무늬만 사교적’이에요…..”
수상소감 중
작가에게 관용을 베푸는 독자는 이 세계에 단 한 명도 없다.
이것은 잠언이 아니다. 이것은 통계에 관한 말이다.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들의 대한민국01권 - 박노자 (0) | 2007.03.19 |
---|---|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 (0) | 2007.03.16 |
평행우주 PARALLEL WORLDS, 미치오 카쿠 MICHIO KAKU, 김영사, 2006 (0) | 2007.03.06 |
윌리 로니스 사진전 (0) | 2007.02.28 |
무비위크 No 265 중 (0) | 2007.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