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 문학세계사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김륭
1.
실직 한 달 만에 알았지 구름이 콜택시처럼 집 앞에 와 기다리고 있다는 걸
2.
구름을 몰아본 적 있나, 당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내 머리에 총구멍을 낼 거라는 확신만 선다면 얼마든지 운전이 가능하지
총각이나 처녀 딱지를 떼지 않은 초보들은 오줌부터 지릴지 몰라
해와 달, 새떼들과 충돌할지 모른다며 추락할지 모른다며 울상을 짓겠지만
당신과 당신 애인의 배꼽이 하나인 것처럼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위질하는 것은 주차딱지를 끊는 말단공무원들이나 할 짓이지
하늘에 뜬 새들은 나무들이 가래침처럼 뱉어놓은 거추장스런 문장일 뿐이야
쉼표가 너무 많아 탈이지 브레이크만 살짝, 밟아주면 물고기로 변하지
3.
구름을 몇 번 몰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해나 달을 로터리로 낀 사거리에서 마음내키는 대로 핸들만 꺾으면 집이 나오지
붉은 신호등에 걸릴 당신의 고층아파트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보다 깊은 어머니 한숨소리에 눈과 귀를 깜빡거리거나 성냥불을 긋진 마
운전 중에 담배는 금물이야
차라리 손목과 발목 몇 개 더 피우는 건 어때? 당신
꽃 피우지 않고도 살아남는 건 세상에 단 하나, 사람뿐이지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새가 아니라 벌레야
구름이란 눈이나 귀가 아니라 발가락을 담아내는 그릇이란 얘기지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말이야 그걸 아는 나무들은 새를 신발로 사용하지
종종 물구나무도 서고 말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해
구름이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소란스러울까
4.
아주 드문 일이지만 콜택시처럼 와 있는 구름의 트렁크를 열어보면
죽은 애인의 머리통이나 쩍, 금간 수박이 발견되기도 해
초보들은 그걸 태양이라고 난리법석을 떨지
눈물이 완성되는 순간
김륭
벽이 쩍쩍 갈라진 임대아파트 아줌마들 모여
인형 눈을 붙인다. 매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새빨개진 눈 비비며
덩치 큰 곰인형에게 눈을 달아준다.
인형에게 눈 주고 반찬값 몇 푼 챙기는
아줌마들의 수다는 실밥 터진 단춧구멍 같아서 방안 가득 뒹구는 인형들 눈에
오래된 별처럼 붉게 터진다.
눈 동그랗게 어디 한번 살아봐라
눈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눈물 없이는 살 수 있는 세상인지
막노동 가는 남편 작업복에, 병든 닭마냥 학교 가는 자식들 앞가슴에
단물 빠진 껌처럼 눈물 으깨 붙이던 아줌마들 엉덩이 비집고
칠순 어머니, 눈물을 단추처럼 매달고 사신 당신도
가물가물 인형 눈을 붙인다.
눈이 없으면 눈물도 없겠지만 정말 그렇겠지만
눈물이란 한사코 칠이 벗겨지지 않는 생(生)의 그늘 적셔 반짝, 입 열게 하는
금(金)단추 같은 것이어서
아예 단춧구멍만한 눈물을 달아준다.
눈물을 단추로 채워준다.
반짝, 인형이 웃는다.
눈물로 웃는다.
달팽이 생태보고서
- 김륭
맞벌이부부들 풀어놓은 아이들이 기어다닙니다
잠 덜 깬 아이들 이마가 창으로 달린 집들이 기어다닙니다
길을 모르니까 길을 잃어버릴 수 없는 아이들이, 가만히 그 길을 잡아당기면
과자부스러기처럼 매달려 나오는 집, 부서진 피아노 음악 같은 아이들이
텔레비전 속 수천 마리 참게 떼들과 함께 기어다닙니다
거품 뽀글거리며 한강 둔치를 기어오릅니다*
잠실대교 교각을 기어오른 어린 참게들이 텔레비전 바깥으로 뛰어내립니다
톰방톰방 아이들 손가락 하나씩 물고 기어다닙니다
아이들에게 젖을 물려본 적 없는 예쁜 여기자 입술이 달아오릅니다
산책 나온 수많은 시민들에게 신기한 볼거리를 주고 있다며
마이크를 아이스크림처럼 빨아먹으며 시청률을 높입니다
해님놀이방 원장선생님 코끝에 걸린 안경 한쪽 다리가 똑, 참게 발처럼 부러집니다
혼이 난 여기자가 웁니다
아이 하나가 얼른 젖꼭지 물려주지만 가짜젖꼭지는 맛이 없습니다
집이 떠내려가도록 울다가 화면이 바뀌자 방긋 웃습니다
울음이 가짜인지 웃음이 가짜인지 원장선생님도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참게들에게 손가락 물린 아이들만 가짜가 아닙니다
집을 찾아 헤매는 엄마를 찾아 웁니다
원장선생님이 휴지 대신 꽃잎으로 눈물을 닦아줍니다
톡톡, 엉덩이에 불 지펴줍니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 아궁이로 머리만 쏘-옥 내민 아이들이
음악 한 장씩 덮고 막 잠이 들었습니다
퇴근길 맞벌이부부들이 하나 둘 아이들을 찾으러 옵니다
가시투성밤게*가 되어 느릿느릿 기어옵니다
잠들었던 아이들이 가시에 찔린 순서대로 일어나 앙앙 다시 웁니다
달팽이들의 슬픔은 집에 있습니다
내 집 마련 꿈이야 이뤘지만 함께 살 수 없는 집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젖은 음악으로 만들어진 집들이 둥둥 떠내려갑니다
바다가 깊습니다
* 2006년 7월 15일 뉴스 인용- 수천 마리의 참게 떼가 강물을 탈출해 한강 둔치로 기어오릅니다. 집중호우로 물이 탁해진 데다 먹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가시투성밤게 – 집을 만들지 않고 떠도는 밤게과의 갑각류
오래된 꽃밭
산등성이 위에 덩그러니 달이 떠 있었다
마른 웅덩이처럼 비어 있었다
훌쩍, 늙어버린 아내가 그걸 머리에 이고 산책하고 싶다고 졸랐다
나는 바람을 피울 수 없다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녀의 발이 시들기 시작했다
자꾸 어두워지고 있었다
달이 바짝 마른 입안 가득 고인 제 살을 빛으로 흘리듯
아침이 오기 전에 깜깜하게 몸을 비워야 하듯
그녀 또한 비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달이 웃고 있었다
죽음에 돼지머리 눌려 사는 일이 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죽도록 사랑하는 일 또한 그런 거라고
몸이 마음을 흘려 비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나는 있는 힘껏 울었다
그녀에게 물을 주었다
김륭, 당선소감 중
그러니까 최근 내가 알게 된 몇 가지를 말하자면 이렇다. 구름이 택시보다 빠르다는 것.
… 느낌이 왔다. 얼마나 편한 일인가. 좀 상투적으로 말하자면 죽음이 삶을 살살 달래가며 데리고 산다는 느낌…
스트랜딩 증후군
김초영
파일럿 고래들이
피아노의 검은 건반처럼 일렬로 누워 있다
그들은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다
중앙병원 307호실,
누워 있는 엄마의 팔뚝에 옅은 햇빛이 스며든다.
오늘도 멍이 하나 더 늘었다
의사는 건조한 표정으로 엄마의 굳어가는
관절들을 만져보곤 했다
스스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겁니다
일종의 무의식 상태의 자살이죠
의사는 녹음테이프를 재생하듯 또박또박 말한다
녹색 페인트칠이 벗겨진 산소통이
조용한 병실의 오후를 조금씩 갉아 먹고 있다
결국 대부분의 고래떼는 죽고 말았다, 고 보도되었다
중장비를 동원해 바다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감행했지만 전부 살려 내지는 못했단다
파일럿 고래들은 하늘로 날려던 것이었을까
자살하기 위해 육지까지 올라온 고래들처럼
엄마가 가는 물줄기를 내뿜는다
밀린 병원비가 불어나듯
투명한 오줌비닐이 노랗게 부풀어 올랐다
신문에 죽어 있는 고래들의 사진이 실렸다
죽은 고래들의 미약한 주파수가 좁은
병실 안을 맴돌다 사라진다
엄마도 저 주파수를 좇아 육지로 가고 있을지 몰라
흑백의 고래 사진을 오려 엄마의 머리맡에 붙여두었다
고래의 순한 눈이 감기고 있다
눈알이 오랫동안 따끔거렸다
* 2006년 11월 10일 뉴질랜드 오클랜드 북부 루아카카 해안가에서 고래들 77마리가 ‘집단 자살’을 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고래들은 자신들의 생명이 휘험하다고 인식하거나 폐렴에 걸렸을 경우에 육지로 올라와 자살한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스트랜딩 증후군’이라고 한다.
덕장
김초영
옛날,
그러니까 내가 아주 어릴 적
우리 집에는 비린내가 둥둥 떠다녔다
옷장을 열면 식구들의 겨울 코트 너머에서
비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다
밤이 되면 옷장 안에 푸른 심해가 펼쳐졌고
잠자는 내 발등 위로 바닷물이 뚝뚝 떨어졌다
햇빛이 좋은 날이면 엄마는 온 마당에
생선을 깔아 놓고 말리기 시작했다
파리 떼들 극성을 부리면 엄마는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파리들을 잡기도 했다
누렇게 변한 신문지 위에 죽은 파리들이
쌓여가면서 생선들은 축축한 목숨을 허공에
증발시키고 바삭하게 마르고 있었다
겨울이 되자 머리 위로 잔뜩 생선을 올리고
시장으로 나가던 엄마
생선의 무게에 엄마의 목이 몸 속으로
조금씩 파고들었다
묵직한 생선의 살점들이 벌긋벌긋한 엄마의
몸을 난쟁이로 만들고 있었고
마당 안에는 질척대는 주검들이 미로처럼 펼쳐졌다
끝내,
바다는 사라졌고 떼지어 헤엄치던
생선들은 길을 잃고 파닥댔다
공자처럼 드러누워 생(生)을 말리던
생선들은 짜디짠 소금물이 그리워
3밀리미터의 두께로 압축된 몸을 이끌고
저마다의 우주로 하향하고 있었다
엄마는 더 이상 난쟁이가 되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그 해의 파삭한 여름을 통과하고 있었다
가끔 우리 집 마당에 해끔하게 차려입은 생선들이
다시금 찾아와 바싹 마른 엄마를
먼 바다로 조용히 데려가 적셔주고는 했다
그러니까, 아주 옛날에
포도씨를 뱉으며
김초영
오도독,
엄마는 파마약 냄새를 풍기며 포도씨를 씹고 있다.
엄마의 배는 커다란 우주 같아서
어떤 것이든 저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저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엄마의 고불고불한 머리카락처럼
복잡한 미로가 있는 건 아닐까.
누워 있는 엄마의 배를 툭, 하고 건드리자
잔잔한 파도가 밀려와 두 발을 적신다.
삼켜버린 포도씨는 엄마의 뱃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겠지.
엄마의 몸이 조금씩 거름이 되어
썩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말없이 포도알만한 눈물을
뚝뚝 흘렸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내 접시에
까만 포도씨가 쌓여가고 있다.
얼마나 많은 포도씨를 먹어야
엄마처럼 포도나무 울창한 커다란
배를 가질 수 있나.
자반고등어
고등어 한 마리를 사왔다
얼음이 잘게 부서진 진열대 위에서
고등어는 비릿한 바다 냄새를 풍기고 있다
미처 바꿔놓지 못해 녹기 시작한 얼음들이
가는 물줄기를 만들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물줄기가 계속해서 더해지자
커다란 마트 바닥에 작은 바다가 생긴다
등뼈를 잃고 누워 있던 고등어 떼들,
푸른 등을 곧추세우고 바다고 뛰어들기 시작한다
만선을 기대하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힘들게 돌아온 배는 잡아온 고등어로 가득했다
여자들은 급히 고등어의 배를 가르고
소금을 뿌리며 아버지에 대해 함구했다
물 좋은 고등어를 잡았다며 회를 쳐
소주잔 부딪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칼을 대자 터지듯이 갈라지는 고등어의 붉은 속살,
보름 뒤 떠내려온 아버지의 불어터진 얼굴이
싱싱한 고등어의 붉은 살을 닮아 있었다
집에 돌아와 고등어를 굽는다
프라이팬 안으로 떠다니는 비릿한 바다,
식용유로 코팅된 고등어가 하얗게 익어간다
여기저기 물어뜯긴 아버지의 흐물거리던 얼굴이
지글대는 프라이팬 안으로 스며든다
몇 차례씩 뒤집히며 익어가는 고등어를 보며
이빨 자국 같은 아버지의 흉터를 젓가락질하자
그물 속에 교차된 아버지와 고등어가 바삭하게 튀겨지고 있다
잘 익은 고등어,
묵직한 프라이팬은 만선이었다
미늘
이산
소아마비라는 병을 품고 그는
오늘도 병원 복도에 놓여 있다
발음보다 먼저 한쪽으로 굳어버린 입술
그 사이로 결합되지 못한 유년의 언어가 반복된다
저 뒤틀림의 정점에 모인 힘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낚싯줄이 핑- 하고 울릴 때
그의 몸은 마비에서 깨어나는 듯 반대쪽으로 쏠린다
팽팽한 생의 대결
그 안간힘 사이를 짚어낼 수 없도록
햇빛이 너무 밝다
이따금 몸에 박힌 낚싯바늘이 성가시다는 듯
그는 퍼덕거린다 끌려가지 않으려
팔은 다리는 입술은 여전히 낚싯줄을 당기고 있다
반대쪽으로 비틀리고 있다
진동을 따라 바늘은 속살 깊이 몸을 숨긴다
조금씩 지쳐가는 근육이 또 한 번 경련을 일으킬 때
낡은 화분처럼 그를 담고 있는 휠체어
약봉투를 손에 든 여자는
주사를 놓듯 손잡이에 힘을 밀어 넣는다
약 기운으로 희미한 복도
밀려오는 사람들을 헤치며
그들은 눈이 먼 심해로 돌아가는 듯했다
엘리펀트맨
이용임
사내의 코는 회색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사내는 가만히 코를 들어올린다
형광불빛에 달라붙어 벌름거리는
사내의 콧속이 붉은지는 알 수 없다
여자를 안을 때마다
사내는 수줍게 코를 말아올리고 입술을 내민다
지리멸렬한 오후 두시에
사내는 햇빛을 쬐며 서툴게 담배를 핀다
사내의 코가 능숙하게 따먹을
푸르고 싱싱한 나뭇잎들은 없다
계절은 바람과 구둣소리에 쓸려
태양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구내식당에서 이천오백 원짜리 밥을 먹을 때마다
사내는 코끝이 벌개질 때까지 힘껏 코를 들어올린다
버스가 급정거할 때마다
손잡이에 걸린 코를 황급히 움켜쥐며 한숨을 내쉰다
담배연기와 밀어와 휘파람과 잠꼬대
사내의 긴 코 어딘가에서 아직도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을
환절기가 되면 사내는 지독한 축농증을 앓는다
가을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아래 서서
사내는 코로 낙엽을 주워올린다
가지에 올려놓은 잎사귀가 떨어질 때마다,
다시
종이도시
-노숙
이용임
이음새가 없는 벽입니다
누렇고 두꺼운 종이에 둘러싸여
잉크냄새가 날아간 활자로 교직한 이불을 덮고
잠이 듭니다
머리맡으로 수많은 구두들이 지나갑니다
노래와 욕설이 구름처럼 흘러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의 하늘을 얹고
나의 밤은 꿈이 없습니다
한 달 전, 반 년 전, 일 년 전의 신문기사들
지나간 시간들을 뒤집어쓰고 누우면
두꺼운 발바닥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합니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소리가 심장에 쌓입니다
내 몸 속에는 혈관이 없답니다
소리없이 날아다니는 바람만 있죠
얼마나 오래 눈을 감고 있으면
흰자와 검은자의 경계가 풀어지나요
오늘도 안개 어제도 안개 그제도 안개
눈깔이 허옇게 뒤집힌 태양 아래
손바닥을 올리며 엎드려 벌벌 떠는
이곳은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종이로 만든 나의 집입니다
신전 앞에 서다
이혜미
늘어난 벨트 구멍 사이로 피곤이 흘러내리는 밤
나는 먼 길을 돌아온 수행자, 다시 신전 앞에 선다
의식은 하루에 두 번
신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옷을 벗어야 한다
티셔츠를 바지를 브래지어를 벗고
부재하는 애인의 입술을 벗는다
형벌처럼 매달린 귀걸이와 반지를 풀어놓는다
세상에서 제일 얇은 감옥, 스타킹을 돌돌 말아 내리고
팬티를 벗으려다 아참, 화장실에 가서
팽창해 있던 시간의 무게까지 버리고 온다
신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제 무게를 모두 내려놓는 고행이 필요하다
렌즈를 빼려다가 눈이 함께 빠져나왔다
살가죽을 벗어 내리고 내장을
꺼내어 세탁기 속에 던진다, 어머나!
갑자기 내 이름이 생각나질 않아
내친 김에 말도 버린다 (차압당한 심장은 어쩌지?)
두 발 들어가면 가득 차는 신전
나에게 허공 한 줌 허용하지 않는 신전
삶이 나를 견뎌낼 수 있는
꼭 그만큼이 나의 무게가 아닌가
모두 벗어던지고 비로소 날씬해진 나는
한 발을 들여 놓으면 십자가의 상징인 양,
눈금이 붉게 날을 세우는 그 체중계 신전에
고해성사를 하듯 가만히
하루를 올려 놓는다.
<시조>
젖 물리는 여자
노영임
뜨건 국밥 후후 불며 젖 물리고 앉은 여자
어린 건 한껏 배불러 빨다가 조몰락대다
꽉 쥐고 해살거리며 또글또글 웃는다
한길에는 늦게 깨어난 게으른 햇살들이
엉덩이를 흔들며 사뿐사뿐 걸어가는
살짝 휜 S라인 여자들 발꿈치를 좇고 있다.
공갈빵처럼 부푼 가슴 아슬아슬한 실루엣
필라멘트 깜빡깜빡 전류를 방출하는
뾰족한 고욤 두 개가 손끝에만 대도 터질 듯
휘청, 가는 허리 애기집 하나 못 얹어도
둥지 속 알 넘보듯 집요한 사내들의 눈
왜일까, 늪에 빠지듯 지독한 허기 몰린다
순환소수처럼 잇고 이어 사람에 사람을 낳은
빌렌도르프 비너스* 따뜻한 양수의 기억
넉넉히 젖 물려주는 그런 여자가 그립다.
* 1909년 오스트리아의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여성 나상(裸像).
생식·출산(풍요다산)을 상징하는 주술적·원시적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조>
눈은 길의 상처를 안다
이민아
무제치늪* 골짜기에 사나흘 내린 눈을
녹도록 기다리다 삽으로 밀어낸다
사라진 길을 찾으려 한 삽 한 삽 떠낸 눈
걷다가 밟힌 눈은 얼음이 되고 말아
숨소리 들려올까 생땅까지 찧어본다
삽날은 부싯돌 되어 번쩍이는 불꽃들
성글게 기워낸 길 간신히 닿으려나
내밀한 빙판 걷고 먼 설원 헤쳐가면
삽 끝은 화살 같아져 모서리가 서는데
결빙에 맞서왔던 삽날이 손을 펴고
쩌엉 쩡 회색하늘에 타전하는 모스 부호
마침내 도려낸 상처 한땀 한땀 기워낸다
* 무제치늪 : 울산 울주군 삼동면 정족산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층습원(高層濕原). 6천 여 년 전 생성됐으며 지금도 수많은 습지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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