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 웅진지식하우스, 2007-05-16
“혹시 국민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황우석 사건을 취재하던 어느 일본 방송사 PD가 내게 느닷없이 이렇게 묻는다. 논문이 모두 조작으로 드러난 상황에서도 여전히 황우석 박사를 믿는 한국인들이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논문을 조작하는 과학자는 어느 나라에나 있어도,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과학자가 여전히 국민의 지지를 받는 나라는 분명 한국뿐일 것이다.
“국민성 같은 게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에게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옆 학교에서는 아직도 조회를 하는 모양이다. 가끔 월요일 아침이면 각 반 학생들이 운동장에 이열종대로 서고, 선생들이 그 줄 앞에 도열한 가운데 교장이 높은 단상에 올라 일장 훈시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군대의 열병식을 닮았다. 교장은 사단장, 선생들은 연대장, 학생들은 병사, 어떻게 보면 2차대전 중의 포로수용소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학생들은 포로, 선생들은 간수, 교장은 수용소장.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제 몸을 기업의 요구에 맞게 뜯어고친다. 언뜻 자발적인 것으로 보이나, 이 ‘존재미학’은 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강요한 ‘생존미학’일 뿐이다.
2005년 고려대학교에서는 이와 관련해 기념비적 사건이 벌어졌다. 학교 측이 큰 건물을 지어준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려 하자, 몇몇 학생들이 거기에 항의하여 몸싸움을 벌였다. 다음날 거의 전교생이 시위 학생들을 질타하며 아예 총학생회까지 탄핵하겠다고 나섰다. ‘회사인’의 이상이 입사도 하기 전인 대학생들의 신체와 정신을 장악해버린 것이다.
몇 년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려대학교 진입이 저지되었을 때, 대부분의 학생은 이를 통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학생들이 왜 이번엔 그리도 분노한 것일까? 알량한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호화 호텔을 방불케 하는 최신식 건물.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후원과 졸업 후 진로의 상관관계. 게다가 대기업 입사율은 그 자체로 학교의 서열을 평가하는 주요한 기준 아닌가.
덕분에 삼성이라는 기업의 횡포에 흘려야 했던 노동자들의 피눈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직 히틀러만이 실현할 수 있었던 ‘무노조 경영’에 명예철학박사 학위가 수여되는 것을 지켜보는 인문학 교수들의 참담한 자괴감.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것으로 드러난 거대자본 앞에서 느끼는 서민들의 공포감. 안암골 주민들은 이를 너그럽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들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학생들의 몸싸움.
“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어느 작가는 이렇게 물었다. 몰라서 묻는가? 거대한 것은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낯설게 느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명함 문화였다. … 그런데 한국에서는 처음 보고서 다시 볼 일이 없는 이들까지도 서로 명함을 주고 받는다…
이렇게 명함을 남발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것은 이 사회의 공사 구별이 모호한 탓이거나,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 속에서 관계 맺기가 남발되는 현상일 수도 있다.
작가(송상희)는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계들의 기본 콘셉트. 작동 방식은 헬스 기계처럼, 하지만 형식은 고문 기계로, 외향은 어린이 장난감처럼 보이게(그래서 알록달록하게 칠했습니다) 작업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문 기계’의 원리를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즉 발전과 진보를 하고, 합리화되기 위해서는 역으로 심한 고문-야만 행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상식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성공이라는 가상의 목표 아래 마음속의 진실, 본래의 생각들조차도 헬스 기구에서 몸을 다듬듯이 얼마든지 가꾸고 조작하여 규격화될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려 하였습니다. 웃음조차도 성공을 위해서는 정확하게,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웃어야 하기 때문에 ‘웃음 만들기 마우스피스’가 필요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유학을 가서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한 아프리카 친구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왜 나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고, 우리나라에 대해서만 물어보니?”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나 자신도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결국 박정희의 자식, 우익 국가주의의 속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증세는 이렇다.
외국인을 만나면 제일 먼저 “너 어느 나라에서 왔니?”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한 개인을 졸지에 특정한 나라의 국가대표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유난히 애국적인 나라의 ‘국가주의 코드’다…. 우리보다 GDP가 많으면 괜히 그가 존경스러워진다. 우리보다 적으면 은근히 무시하면서 괜히 그에게 ‘잘살아보세’, 새마을운동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사람을 늘 위아래로 놓고 보는 ‘보수주의 코드’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 운전자들은 녹색 신호등 점등 2초 만에 정확하게 경적을 울리고, 식당에서는 5분 만에 음식이 나오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고, 식사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평균 식사 시간의 4분의 1인 10분이면 뚝딱 해치우며, 술도 바로 취기가 오르는 폭탄주까지 개발해냈다고 한다. (<세계일보>, 2006/07/04)
버스의 작동을 인간의 생체 리듬에 맞추는 게 아니라, 인간 생체의 움직임을 버스의 속도에 맞춘다. 한국의 버스는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 거꾸로 인간이 버스의 편의를 배려한다. 빨리 달리고 싶어하는 버스를 위해 인간의 몸은 신속히 승차하고, 신속히 하차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지체할 경우 운전석의 앉은 인격화한 버스에게 종종 욕을 들어 먹는다. 이때 다른 승객들도 내심 버스 편이다.
속도에 익숙한 몸에 가장 큰 고문은 ‘기다림’. 한국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은 심하게 마모되어 있다.
생산을 위해 속도감이 기입된 몸은 느린 속도에 불쾌감을 느낀다. 속도는 이렇게 지각의 욕망까지 변화시킨다.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여가’에 속하는 활동이다….하지만 한국에서는 노동의 기계적 속도가 여가의 영토까지 정복했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가 ‘삶을 위해 일하는 문화’가 아니라 ‘일을 위해 사는 문화’임을 의미한다.
서구 사회의 느림은 게으름도 아니고, 비효율도 아니고, 경쟁의 배제도 아니고, 역동성의 결여도 아니다. 그저 속도의 다른 차원일 뿐이다. 그리고 삶은 전쟁이 아니다.
이들과 대조가 되는 것이 바로 ‘브릭’ 사이트의 건조한 태도다. 그 사이트 글 목록을 보면 종종 괄호 치고 ‘추측성 내용 삭제’라고 표기한 글들이 눈에 띈다. 여기서는 확실한 근거가 없이 추측의 날개를 펴는 글을 올리면 곧바로 관리자에 의해 가차 없이 삭제된다. 한 마디로 이곳은 사실을 논하는 곳이지, 상상의 날개를 펴는 곳이 아니라는 얘기다. 답답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엄격함이 데카르트가 말하는 합리주의적 태도다.
한국에서 평등은 신분제의 폐지가 아니라 모든 이가 양반이 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실제로 주위에 양반가문 출신이 아닌 사람은 거의 없다. 조선 후기의 어느 시점부터인가 ‘전 인민의 양반화’가 이루어진 셈인데, 이렇게 인구의 대다수가 지배계급인 사회도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대한민국의 명품 문화는 취향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 성격이 조선 후기 체면 문화를 상업화한 것에 가깝다. 한국식 자본주의의 천민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알게 모르게 한국 사회에서는 다양한 암묵적 예법이 존재한다. 가령 상사나 연장자 앞에서 술을 마시려면 몸을 옆으로 돌려야 하고, 그들 앞에서 맞담배질을 해서는 안 되며, 그들보다 술자리를 먼저 떠나서도 안 된다. 그 밖에도 상대에게 건방지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시선, 어법, 제스처를 제어하는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체계가 존재한다. 그것들은 ‘내가 감히 당신과 대등할 수는 없지요’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인은 뱃속이 든든한 포만감을 즐기고, ‘시원하다’는 감탄사와더불어 뜨거운 국물이 식도로 내려가 뱃속을 풀어주는 것을 즐긴다…한국의 음식문화는 촉각적이다. 맥루언의 표현을 훔치자면 한국에서 ‘음식은 마사지’다.
태국 여행 중에 가이드로부터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일본의 남성들이 술집에 와서 그냥 얘기만 하고 가는 반면, 한국 남성들은 본전을 뽑으려고 팁을 준 만큼 여성의 몸을 주물러대고, 중국 남성들은 팁으로 준 액수의 열 배만큼 주무른단다.
한국은 자극의 나라다. 간판은 눈을 할퀴고, 소리는 귀청을 때리며, 냄새는 코를 찌르고, 음식은 혀를 찢어놓고, 손가락은 도처를 더듬는다. 전시회장에 와서 마구 작품을 만지는 것을 보면, 그 접촉 욕구의 강렬함은 아찔할 정도다.
시험문제 하나라도 틀리면 세상이 무너질 듯 난리를 쳐도 제 아이가 공공의 규칙을 깨는 데서는 아무 문제도 못 느낀다. 부모들은 제 아이가 사회에 나가 공공선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나 홀로 규칙을 초월하여 ‘떵떵거리기’를 바란다.
얼마 전 주부들을 위한 강연을 했다. 강연 후에 나온 질문은 역시 대부분 자녀 교육에 관한 것. 애들 억지로 공부시키지 말랬더니 한 어머니가 말한다. “우리 아이는 5년 전 강제로 과외를 시켜주지 않았다고 지금 저를 원망해요.” 자기가 공부 안 하고 왜 남을 원망하는지 모르겠다. 그 어머니에겐 이렇게 조언을 해주었다. “걔한테, 지금 혹시 5년 후에 후회할 것 없는지 생각해보라고 하세요.”
베를린 한글학교에서 교포 아이들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운동회에서 짝짓기 게임을 하는데 네 아이가 남았다. 상품을 세 개 마련했기에 한 아이를 떨어뜨려야 했다. “둥글게, 둥글게……” 노래를 부르다가 “셋!”이라고 외쳤는데, 네 아이가 모두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모두 다 친구인데, 누구를 떨어뜨려요?”
한국에 돌아와보니 아이들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한마디로 애들이 ‘되바라졌다’. 독일에 살던 우리 아이가 여름에 한국에 왔다. 아파트촌에서 또래 아이들과 놀라고 내보냈는데, 어느 날 집에 들어와 볼멘소리로 투덜거린다. 모든 아이들이 자기만 보면 일단 “딱지 있어?”라고 묻고, 딱지가 없으면 안 놀아준다는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우리 아이는 친구가 아니라 따먹을 딱지의 공급원일 뿐이다.
아이들이 지나치게 계산적인 것은 철이 없어 그렇다 치고, 아이들의 몸에까지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이 각인된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들은 것 중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이 ‘박정희 덕에 먹고산다’는 어법. 미국에도, 독일에도, 프랑스에도, 일본에도 이런 어법은 없다. 자신이 먹고사는 것을 정치 지도자의 덕으로 돌리는 봉건적 어법이 존재하는 곳은 남한과 북한뿐이다. 남한은 박정희 덕, 북한은 김일성 덕. 남들 다 제 덕에 먹고살 때, 남북의 인민들은 여전히 왕의 은덕으로 살아간다.
사실 항공 사고보다 더 복잡한 게 경제 문제다. 문제의 과학적 인식과 합리적 해결에 익숙하지 않은 몸들은 여기서 즐겨 의인법을 사용한다. 어떤 일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사실 머리가 아픈 일. “실업이 급증한 원인은 무엇이냐?”고 묻는 대신에 “실업을 늘린 놈이 누구냐?”고 물을 때, 머리 아픈 ‘과학’은 재미있는 ‘얘기’가 된다. 원인의 분석을 생략한 채 잘되면 ‘왕의 덕’이요, 못 되면 ‘왕의 탓’이라 말하는 어법은 여기서 비롯된다.
언젠가 모 전자의 사장이 대통령의 형에게 뇌물을 주려다 발각됐다. 대통령이 “배울 만큼 배운 분이 촌로를 찾아가 뭐하는 짓이냐”고 한마디 하자, 그는 한강으로 차를 몰고 가 투신을 해버렸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뇌물을 주려 했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이 아니다.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 스타일이 구겨진 데서 오는 수치심이다. 죄책감은 죄를 짓는 순간 발생하나, 수치심은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에 비로소 시작된다.
우리가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늘 들었던 말이 바로 ‘남 보기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소리. 학교에서도 ‘누가 뭐라 하더라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며 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회에서는 삶의 목표마저 남의 눈에 맞춰지고, 사람들은 남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 하든 올바로 사는 것, 혹은 누가 뭐라 하든 내 멋대로 사는 게 아니라, 이른 바 ‘남 부럽지 않게’ 사는 것, 혹은 ‘여봐란 듯이’ 사는 것이 된다.
얼마 전 문서를 작성할 일이 있어 학교 앞 PC방에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둘러보니 모니터 앞에 앉은 학생들이 넋을 잃고 각종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몸은 현실에 있어도 그들의 정신은 다른 세계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가상세계로 이주하는 이 대규모 사이버 이민의 장관도 오직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리라. 한국이 컴퓨터게임의 생산과 소비에서 앞서가는 것 역시,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 덕분이다.
게임의 세계는 중세적이다. 그 사회는 철저하게 신분적 위계질서에 따라 짜여지고, 그 속에서 각 개인은 제 신분과 주제에 맞는 과제를 맡는다. 거기에는 용감한 전사가 있고, 숭고한 희생이 있으며, 가슴 벅찬 의리가 있다. 비범한 영웅들 주위에는 추종자들이 모이고, 영웅은 이들을 거느리고 이웃 혈맹에 전쟁을 선포한다.
10년 전 당장 수도를 이전하자고 했던 <조선일보>. 이제는 수도를 옮기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에서 황우석을 지원하지 않았다고 질타하더니, 논문이 허위로 드러나자 정부가 그에게 특혜를 주었다고 비난한다. 신문들이 제 주장을 뒤집은 예는 한도 끝도 없다. 말은 발화되는 순간 공중으로 흩어지기에 말을 바꾸고도 잡아 떼면 그만이다. 그래서 구술문화는 변했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항상성’을 갖는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활자문화를 대표하는 신문까지도 구술적이다.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을 못 읽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토론 사이트에 의견을 올리고, 홈페이지에 제 이야기를 쓰고, 사실 오늘날처럼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하는 시대도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그로써 문자문화가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글쓰기는 구술문화에 가깝다. 오랜 사색으로 정제해낸 생각을 주옥 같은 언어에 담는 독백적 글쓰기가 아니라, 반응이 오가는 상황에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곧바로 글자로 옮겨 적는 대화적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이미 ‘산만함’을 현대적 지각의 특성으로 들었다. 처음 비행기의 스틱을 잡으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왼손의 스트롤로 엔진 출력을 맞추고, 오른손의 스틱으로 3D운동을 조종하고, 한 눈으로는 속도계와 고도계를 보고, 다른 눈으로 날개 끝과 지평선을 보면서 창밖의 지형을 살피며 날아야 한다. 어느 하나에 신경을 쓰다 보면 비행은 엉망이 된다. 그때 교관이 옆에서 하던 말이 인상적이다. “주의력을 분산시켜야 합니다.”
라이프니츠는 인간(의 정신)을 ‘창 없는 단자’라 불렀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사방으로 창을 열어놓고 산다. 개인(individual)이 근대인의 조건이라면, 분열자(dividual)는 탈근대적 인간의 조건이다. ‘조건’이란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을 뜻한다. 현대인은 어차피 분열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 디지털 통각을 가진 이는 멀티태스커로 진화할 것이고, 그것 없이 그저 산만하기만 한 이들은 넓은 정보의 바다를 표류하다가 해체되어 사라질 것이다.
게임을 통해 젊은 세대는 미래의 생산계급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미래의 블루칼라는 아마도 오늘날의 프로게이머를 닮았을 것이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복제의 발전에는 단계가 있다. ‘1) 복제는 실재의 반영이다. 2) 복제는 실재를 변질시킨다. 3) 복제는 실재의 부재를 감춘다. 4) 복제는 실재와 관계를 갖지 않는다. 5) 복제는 자신의 순수한 시뮬라르크다.’ 한마디로 복제는 처음엔 원본을 베끼다가 점차 독립된 삶을 살게 되고, 나중에는 아예 원본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원본을 대신하는 복제, 원본 없는 복제,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복제를 흔히 ‘시뮬라크르’라 부른다.
‘아우라’라는 낱말의 원뜻은 ‘숨결’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라.
얼마 전만 해도 해외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의 관광객들은 어딘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어렵게 찾아와서는 사진만 찍고는 서둘러 다른 데로 가버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being)는 체험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진으로 남기는, ‘언젠가 거기에 있었다(having been)’는 사실의 증거. 그 사진들은 앨범이나 CD, 혹은 하드디스크에 담겨 아우라와 반대되는 체험, 즉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떤 가까운 것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체험을 매개할 것이다.
그 모든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양반문화에는 인간적 가치, 인문적 교양, 귀족적 명예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은 양반문화의 이 역사적 성취는 내버리고, 척결해야 할 신분제 의식을 계승했다. 한국의 천민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정보사회의 인간은 빌렘 플루서의 말대로 자신의 꿈을 앞으로(pro) 던져(ject) 실현하는 ‘기획(project)’자가 될 것이다.
서구 사회는 튼튼한 문자문화의 바탕 위에서 천천히 영상문화로 이행하고 있지만, 한국은 문자문화가 허술한 상태에서 급속히 영상문화로 넘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불안함이 있다. 문자 능력의 바탕이 없으면 아무리 진화한 정보적 신체라 하더라도 디지털 ‘기능공’의 수준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자문화가 강한 곳에서는 네트워크를 통해 지식과 정보가 오가지만, 문자문화가 약한 곳에서는 그저 뜨거운 교감과 반감이 오갈 뿐이다. 한국의 인터넷은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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