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어사전, 남경태, 들녘, 2006
화면상에서 미사일이 명중하면 그는 임무를 훌륭하게 명중한 것이다… 이렇듯 전쟁의 성격이 가상이었으므로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인 보드리야르는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1991년에 그는 같은 제목으로 책을 썼다).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이지만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키며, 실재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어떠한 실재와도 무관하며, 그 자체의 순수한 시뮐라크르(모방)다”(보드리야르,「시퀼라크르와 시퀼라시옹」).
심지어 빛은 월, 수, 금요일에는 입자이고 화, 목, 토요일에는 파동이라는 농담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다시 말해 빛은 입자로 관찰하고자 하면 입자로 보이고 파동으로 관찰하고자 하면 파동으로 보였다는 이야기다.
보는 만큼 아는 게 아니라 아는 만큼 보는 것이다.
상품의 진정한 가치는 노동으로 측정된다. 한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입된 노동량이다.
사물 자체와 사물에 관한 감각이 일치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19세기 영국의 역사가인 액턴이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설파했듯이 최고의 권좌에 오른 순간부터 이성은 타락하기 시작했다.
감각은 자료에 불과할뿐 아직 경험이 아니다. 감각 자료가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바라보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모순은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비해 소유가 사적이라는 데 있다.
신의 입을 닫았으니 이제는 인간의 입을 열어야 한다.
‘개성 있는’ 청바지를 ‘대량으로’ 판매하려는 회사 측의 모순, 남들과 똑같이 사는 게 죽기보다 싫어 대량 복제품을 사서 입는 소비자의 모순- 개성의 상품화란 이렇듯 자체 모순에 불과하다.
아기는 비슷한 또래의 다른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거울 앞에서와 같은 제스처를 취한다. 거울을 밀치듯이 그 아기를 밀어 아기가 넘어지면 오히려 자기가 운다. 자기가 넘어진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이 생각하는 가장 쓸모 있는 공부는 영어와 컴퓨터일 것이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영어에 능숙하고 컴퓨터를 잘 다루면 학교 성적은 물론이고 장차 취업과 승진에도 훨씬 유리하리라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자. 영어와 컴퓨터를 잘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부의 목적이 아니라 다른 공부를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영어와 컴퓨터를 공부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수단을 목적으로 여기는 전도적 가치관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본말이 전도되어 있는지는 교육부에서부터 드러난다. 원래 교양과 교육을 함께 뜻하는 education이라는 단어가 주로 교육으로만 통용되는 게 그 단적인 예다.
소쉬르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언어구조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인간이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자신의 말과 글은 실상 자신이 만들지 않은 문법에 맞춰 자신이 만들지 않은 단어들을 나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기시감은 심리학의 용어라기보다는 기억의 속성을 말해주는 개념인데, 대부분은 착각에 기인한다. 어떤 풍경을 보거나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의 두뇌는 풍경이나 얼굴 전체가 아니라 특징적인 일부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나머지는 배경으로 기억한다. 따라서 분명히 처음 겪는 경험이라 해도 경험의 부분적 특징이 같을 경우 두뇌 속에 저장된 과거의 경험이 되살아나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소쉬르는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 “개는 짖어도 개라는 낱말은 짖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마당에서 뛰노는 실제의 개(기의)를 개라는 이름(기표)으로 불러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개를 소나 닭으로 바꿔 불러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 개를 개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뭘까? 그런 이유는 없다. 그것은 순전한 우연이다. 개를 개라고 부르는 것은 개라는 낱말이 지시하는 대상, 즉 실제 개와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언어 체계에서 정해진 약속일 따름이다. 여기서 소쉬르는 차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끄집어낸다. 개는 소나 말이 아니기 때문에 개다. 목요일은 수요일이나 금요일과 다르기 때문에 목요일일 뿐이다.
인간이 최초로 식물을 노예화한 과정이 바로 농업혁명이다.
“하나의 물건도 집어들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려놓아라.”
“아무것도 집어들 수 없는데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그럼 가져가러라.”
“말할 수 있는 도(道)s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도덕경」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을 쓸모있게 만드는 것은 그릇 속의 빈 곳”
역사적으로 마녀사냥은 중세에 성행했던 종교재판에 근원을 두고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터무니없게 여겨져도 당시 종교재판관들은 엄연히 신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다. “사람의 엄지손톱 위에 천사 몇 명이 앉을 수 있는가?” 또는 “미사를 올릴 때 어느 대목에서 할렐루야를 외쳐야 하는가?” 등이 중세 종교회의의 ‘진지한’ 주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녀사냥도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다.
종교재판의 과정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았다. 명칭이 재판이라고 해서 오늘날의 법적 절차를 연상하면 안 된다. 우선 종교 재판관은 누구의 고소도 필요 없이 의심이 가는 사람을 데려다놓고 바로 심문할 수 있었으며, 당사자의 자백이 없어도 두 사람의 증언만으로 간단히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게다가 고문도 승인되었다. 냉전시대의 간첩 신고처럼 교회는 이단에 대한 밀고도 적극 장려했다.
이를 테면 마녀는 종교적 희생야인 셈인데, 실제로 그 제물이 된 사람드은 꽤 많았다. 모두 합쳐 만 명이 넘는 여자들이 희생되었고 한 번에 백 명 이상이 처형되기도 했다. 백년전쟁의 히로인인 프랑스의 잔 다르크도 영국군의 포로로 잡힌 후 마녀로 몰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화형에 처해진 사건은 너무도 유명하다.
현실이 모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모순을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시각을 가져야만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다. 대학입시 논술을 비롯한 일반적인 글쓰기에서는 흔히 모순이 없이 일관적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데리다 같은 사람은 모순과 불완전함이란 결함이 아니라 글 자체에 필연적으로 내포된 고유한 특성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이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훔쳐 팔다가 검거되었다고 하자. 이 사건에서 청년은 행위의 주체이고, 오토바이를 훔쳐 파는 것은 행위의 방법이며, 유흥비를 마련하는 것은 행위의 목적이다. 행위의 원인은 여기에 없다. 그러나 사건을 보도하는 기사는 흔히 목적을 원인으로 둔갑시킨다. 범죄의 원인과 목적을 동일시하면 그런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방책을 세울 수 없다. 원인을 추측해보면 청년은 놀고는 싶은데 돈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범죄를 예방하려면 청년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과, 놀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방책이 다 필요하다.
헤겔은 특정한 명제나 사물의 상태를 정립으로 보고 여기에 반정립이 대립해 종합이 이루어진다는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 법칙을 확립했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E. H. 카는 이렇게 말했다. “흔히 사실(史實)은 스스로 말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역사가가 사실에게 말을 걸 때에만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떠한 사실에 어떠한 순서, 어떠한 문맥으로 발언을 허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번역이 원래 그렇지만 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각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성서의 원문이 원래의 뜻을 유지하기란 어렵다(그리스도가 실제로 썼던 언어는 아람어로 추정되므로 히브리어도 ‘원본’은 아닌 셈이다). 더구나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기 때문에 인명이나 지명은 번역자가 알아서 적당히 읽어주어야 한다. 오류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 큰 문제는 다수와 소수를 구분하는 근거가 전혀 필연적인 게 아니라 우연적이고 자의적이라는 점이다. 다수는 정상이고 소수는 비정상이다. 이것이 소수자를 배제하는 ‘다수결의 원칙’이다. 그러나 미셸 푸코가 광기의 예를 들어 말했듯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정상과 비정상은 그 자체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늘 시대의 담론에 따라 달리 규정될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다수는 다수이기 때문에 정상이고 소수는 소수이기 때문에 비정상이라는 동어반복의 논리밖에 남지 않게 된다.
부처는 ‘깨달은 자’라는 뜻이므로 스승은 될지언정 신은 아니었다. 그런 탓에 초기 불교에서는 불상을 만들어 신처럼 섬기는 게 금지되었다. 그림에서 굳이 부처의 모습을 표현해야 할 때는 빈 의자나 발 모양을 그려 부처의 상징으로 나타내곤 했다. 불상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간다라 미술부터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은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배워 출세하라는 격려금이나 마찬가지다.
칸트는 그 전까지 도덕을 의지와 연관시키던 도덕론을 거부하고 도덕을 의무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짜 도덕은 의무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재민을 돕자는 텔레비전 캠페인을 보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ARS 전화를 걸었다면, 그것은 칭찬받을 행위이기는 해도 도덕적인 행위는 아니다. 똑 같은 자선 행위라 해도 의무에서 우러나와야만 도덕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즉 ‘도와주고 싶다’가 아니라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도덕적 태도다.
문자는 항상 인간을 짓누른다. 어떤 메시지든 문자로 포착되면 즉각 고형화되고, 고체 특유의 경직성과 ‘권위’를 가지게 된다. 그에 비해 예술은 부드러운 액체처럼 매끄러워 특정한 형태가 없다. 그래서 문자의 교훈적 특성과 계몽성에 질린 인간은 예술을 통해 일체의 권위로부터 해방된 느낌을 만끽한다.
외국인이 본 한국의 첫 인상은 물론 중요하지만 굳이 칭찬을 유도해서 만족하려는 심리는 대체 뭘까? 미국 대학생들이 ‘Zen’ 또는 ‘禪’이라고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든가, 비틀스의 한 멤버가 인도의 사상에 심취했다든가, 프랑스의 유명한 도예가가 고려청자에 감탄사를 연발했다든가 하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게 뭘까? 서양인들도 동양의 깊은 정신과 예술 세계를 아는구나 하고 만족을 얻을까?
인간 개인은 한 개체를 이루지만 엄밀히 말해서 하나의 생명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의 피부에는 작은 벌레들이 상존하고, 우리의 몸속에는 무수한 세균들이 서식하며, 때로는 각종 바이러스와 기생충도 산다. 개중에는 해로운 것도 있으나 무해하거나 유익한 것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신체는 개체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태계와 같은 환경을 이룬다.
“남의 집이 넓으면 내 집이 좁다”
하이브리드 Hybrid
“눈매가 치켜 올라간 여자가 있었소. 그녀는 눈매가 내려간 남자와 결혼하면 정상적인 눈매를 가진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그런 남자를 찾아 결혼했다오. 그런데 그녀는 한쪽 눈이 올라가고 다른 쪽 눈이 내려간 아이를 낳았소.”
마릴린 먼로가 버나드 쇼에게 자신의 외모와 당신의 두뇌가 합쳐지면 완벽한 아이가 태어나지 않겠느냐고 말했을 때 버나드 쇼가 했다는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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