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2007봄호
봄날은 간다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착(時着)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진다
여자가 속옷을 행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 둘 섞여들는지
나빌레라
이은채
거실에 홀로 앉아 차를 달인다
미수를 넘긴 백통 나비장에 기대어 그만 까무룩 잠이 든 사이
잠결에 양 어깻죽지가 순간 스을쩍 들리는 듯
겨드랑이 비밀스런 숲에서 일어나는 무슨 물결소리 찻물 따르는 소리
그러다가 귓속말처럼 잎 틔우는 소리
이윽고 그 잎새 화알짝 펼쳐지며 몸이 송두리째 붕 뜨는 찰라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 쏜살같이 튀어나와 내 손을 덥석 베어무는데
나빌레라!
주홍단추
이은채
방사선과 탈의실 구석에 잠시나마 누군가의 체온을 실었던 가운들이 허물처럼 수북이 쌓여 있다
외투를 벗어 걸다말고
블라우스 두 번째와 세 번째 단추 사이에 슬며시 손을 밀어넣는다
다가와 고요히 안기는 젖무덤
한때 터질 듯 팽팽하게 끓어오르던 시절이 있었겠다
앞자락에 매달려 흔들리는 무슨 열매 같기도 열매 이름 같기도 한 단추들
차례로 눌러 연다
덜컹이는 가슴 애써 싸안고 온 브래지어를 고탄력 팬티스타킹을 가까스로 달래어 벗긴다
서늘한, 여기 어디 무른 틈새에 우물같이 깊은 죄를 묻었던가
뒤늦게 사진에 미쳐버린 K는
모처럼 흑백사진 몇 컷 제대로 찍어두는 거야, 알았지?
병원 입구에 날 내려주며 볼우물에 윙크까지 해댔다
나 맨몸에 갓 세탁된 익명의 허물을 걸쳐 입고 묵묵히 사진 찍으러 간다 그 죄 낱낱이 고하러 간다
마주보고 고하고 돌아서서 고하고 누워 고하고 엎드려 고하고 좌로 구르다 우로 구르다 거꾸로 매달려 찰칵, 찰칵, 찰칵……
누군가의 허물에 내 허물 덤으로 부려놓고 내처 도망쳐오는
나는 자꾸 더듬거리며 블라우스 두 번째와 세 번째 단추 사이에 손을 밀어넣는다
주홍빛 슬픈, 불혹의 네 번째 단추가 고갤 숙인 채
더욱 붉게 뜨겁게 매달리고 있다
복숭아밭에서 온 여자
유홍준
새벽열차가 복숭아밭을 지난다 단물 빠진 껌을 씹으며 여자 하나가 올라탄다 화사하다 싸구려 비닐구두를 구겨 신고 있다 털퍼덕, 허벅지 위에 비닐가방을 올려놓고 빨간 손끝으로 떽 떽 검은 풍선껌을 터뜨리고 있다 복숭아, 복숭아냄새가 난다 저 여자 이내 잠이 들어 군복 입은 사내 어깨에 머리를 처박는다 생면부지 사내의 어깨 빌려 멀고도 먼 꿈을 꾼다 새벽기차표를 끊을 때 군복 입은 사내 곁에 젊은 여자를 앉히는 이상한 역무원이 있다 몸 섞지 않고도 부부가 되어 종점까지 가는 사람들이 있다 퉤, 침을 뱉듯 아침이 온다 두루마리 비닐 같은 아침햇살이 복숭아밭을 덮는다 깨울 수도 없을 만치 깊이 잠든 싸구려 원피스 볼따구니에 밝고 환하고 고운 햇살 한 움큼이 어룽거리고 있다
의자 위의 흰 눈
유홍준
간밤에
마당에 내놓은 의자 위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렸다
가장 멀고 먼 우주에서 내려와 피곤한 눈 같았다, 쉬었다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친 눈 같았다
창문에 매달려 한나절,
성에 지우고 나는 의자 위에 흰 눈이 쉬었다 가는 것 바라보았다
아직도 더 가야 할 곳이 있다고, 아직도 더 가야 한다고
햇살이 퍼지자
멀고 먼 곳에서 온 흰 눈이 의자 위에 잠시 앉았다 쉬어 가는 것
붙잡을 수 없었다
시인의 말
유홍준
오동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아이 하나가 다가온다.
동그랗게 말아쥔 아이의 손아귀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얘야, 그 손
풀어
매미 놓아주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평생 우는 손으로 살아야 한단다.
그리운 겨울 밤
김종
1
문풍지가 드르르 우는 겨울밤
호롱불 밝혀 놓고 앉아 있다
방직공장에 다니는 누나는 아무래도 8시가 되어야 올 것 같고
지겟짐 지는 아버지도 누나를 기다렸다 같이 들어오실 것 같다
어머니는 호롱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느질 하시고
나는 낡은 만화책 신드바드의 모험을 읽는다
밖에는 눈이 내리는지 싸륵싸륵 귀에 쌓이는 소리
이윽고 아버지와 누나가 눈을 털며 들어와서 군고구마 봉지를 내민다
따끈따끈한 군고구마를 내가 받아 들면
어머니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나가신다
마당 한 귀퉁이에 땅을 파고 묻어 놓은 독 속에서
얼음이 깔린 동치미 한 사발을 떠내 오시는 것이다
오지게 가난하면서도 따뜻한 인정만은 배꽃처럼 곱게 피어
그 꽃 아래에서 우리는 저녁밥을 먹기 전에
동치미와 함께 군고구마를 하나씩 맛있게 먹었다
2
군고구마처럼 따끈한 정이 그리운 겨울 밤
이제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나도 이 세상에 안 계시니
온 세상이 싸늘한 윗목처럼 쓸쓸하고
다만 밤늦도록 책상에 앉아 가슴에 품었던 군고구마의 온기를 생각하며
그리움에 싸륵싸륵 젖어보는 것이다
세월을 거꾸로 돌릴 수만 있다면
이 풍요의 세월을 거슬러 가난한 시절로 헤엄쳐 가고 싶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고 누나의 웃음이 따뜻하게 흐르던
그 가난하면서도 가슴 찡한 그리움이 있는 곳
따뜻한 군고구마와 살얼음 낀 시원한 동치미 국물
내 가슴 한 쪽에 자리 잡은 우물에는
언제나 찰랑찰랑 그리움이 차 있다
등뼈
김승기
저 느끼한 표정이 등뼈라니, 변덕스런 날씨가 그녀를 지탱하고 있다니, 얼굴이 등뼈가 되고 등뼈가 얼굴이 도리 때, 유리창이 기둥이 되고 기둥이 유리창 될 때, 눈을 부라린 저 소의 뼈가 허공이 되고 뼈 사이 푸른 허공이 뼈가 될 때, 이중섭의 죽음은, 아니 모든 죽음은 정당방위야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는 등뼈, 나는 오늘 내 등뼈를 빼놓고 부석사 범종처럼 운다
그녀가 자꾸 넘친다
김승기
남편과 잠자리 한 지 1년이 넘는다고 했다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은 괜찮다고 했다 돌덩이 하나
애들에게 자꾸 화를 내게 된다고 했다 자위라고 해보라고 했더니 그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돌덩이 둘
나는 계속 휴지를 빼주어야 했고 돌덩이 셋, 넷, 다섯, 여섯……
애인이라도 사귀고 싶은데 못 한다고 했다 돌덩이 열
열심히 돌덩이를 올려놓지만 그녀의 독은 자꾸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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